• 한국문화사
  • 13권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
  • 제3장 무식하면 짐승과 같습니다
  • 5. 군사 훈련장으로 바뀐 운동장
  • 전시 동원 체제와 ‘튼튼한 여성’
김정화

1930년대 중반 이후 전시 체제가 본격화하면서 체육 활동은 전쟁을 위한 체력 단련이라는 의미가 덧붙여졌고 조선인에 대한 동원 정책으로 연결되었다. 이제 조선 사회에서 여성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2세를 양육하는 어머니로서의 역할이었다. 황국 신민(皇國臣民)의 양육이라는 여성 교육의 목적은 건강한 신민을 생산하는 건강한 모체를 강조하였고, 이것은 체육 교육의 강화로 나타났다. 일제는 출산을 담당할 여학생의 건강과 체력을 관리하고 통제하였다. 일제는 ‘국민 체위 향상과 연성(鍊成)’을 내걸고 모든 국민의 체위 향상과 보건을 위한 스포츠의 생활화를 주창하였다. 스포츠에도 신체제가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스포츠의 본질적 요소와 기능을 충분히 인식한 후 현하(現下) 전시 생활 아래 있는 국민 생활에 대한 모든 요구에 맞도록 하는 추진력”255)주왕산(周王山), 「생활화 신체제」, 『여성』 1940년 11월호, 62쪽.을 의미하였다.

3학년 때. 6월 염천(炎天) 인고단련(忍苦鍛鍊)이란 명목하에 사계절 청천(晴天)이면 매일 5, 6교시가 끝난 후 전교생이 한 시간 동안 운동장에서 과외 운동으로 ‘라디오 체조’를 하였다. 얼마나 지겨웠는지 더러 일사병으로 넘어져 정양실(靜養室, 지금의 양호실)로 가기도 하여 우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하였다.256)배위홍(8회), 「오디 익는 유월이 오면」, 『경북 여고 70년사』, 경북 여자 고등학교, 1999, 213쪽

일제는 비상시의 굳센 여성을 기른다 하여 일상에서 하루 세 번 체조의 생활화를 주창하였다. 체조를 학교 교육의 핵심 과목으로 설정하고 황국 신민 체조와 라디오 체조를 각 학교에 보급한다. 이것이 목적하는 바는 ‘순종하는 신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는 집단 체조가 강조되었는데, 반복 훈련을 바탕으로 엄격한 규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집단 체조는 집단 속에서의 행동을 엄격히 통제할 뿐만 아니라 일사불란한 통일성을 만들 수 있었다.

학교 교육도 전시 체제에 적합하도록 짜이면서 여학생들에게 무술을 가르쳤다.

체조에 있어서는 종전과 같이 ‘경기, 무용, 교련’을 교수하는 외에, 특히 금년부터 목검(木劍)을 체조 과목에 넣고 희망자에게는 치도를 가르쳐, 비상시하의 튼튼한 여성을 만드는 데 힘쓰게 된 것으로, 금춘(今春)부터는 교정으로부터 용감한 기합의 소리가 들려오게 되었다.257)『동아일보』 1938년 4월 2일자.

체육은 군사적 성격이 농후해졌다. 교련 과목과 무도(武道)·체조로 구성된 체련 과목이 새로 생겼고, 여기에 일본인 육군 교관도 배속되었다. 여학생도 교련 시간에는 총잡기, 열병, 분열법을 배웠고 행군도 하였다. 또 가사 시간에는 보건과 위생, 간호 지식을 배워야 하였다. 전시 교육의 강화에 따라 건강 보국을 전제로 한 인고단련이라는 이름으로 강행군 훈련이 실시되기도 하였다. 서울 종로에 위치해 있던 진명 여학교에서는 전교생이 모래 4㎏을 지고 노량진에서 상인천역까지 24㎞를 행군하기도 하였다.258)진명 여자 중고등학교, 『진명 75년사』, 진명 여자 중고등학교, 1980, 128쪽.

때맞추어 여자 체력 검정을 실시하기도 하였고 운동회도 전쟁을 방불하게 치렀다. 경성 여자 사범학교에서 1939년 7월에 열린 여자 전력 증강 경기 대회의 경기 종목은 수류탄 정확하게 던지기, 천인침(千人針) 경쟁, 운반 경쟁, 전령(傳令) 경쟁, 음료수 전송 경쟁, 방화(防火) 경쟁 등이었다.259)김진균·정근식·강이수, 「보통학교 체재와 학교 규율」, 『근대 주체의 식민지 규율 권력』, 문화 과학사, 1997, 108쪽. 전 시 체제기 현모양처 교육은 여성을 단순히 가정에 머무르는 역할로 한정짓지 않았다. 식민 지배자의 요구에 따라 전쟁에 동원될 수 있는 국가 의식을 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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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검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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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공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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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근로 도장으로 바뀌었다. 여학생은 근로 봉사 작업이라는 명분으로 군복 꿰매는 일에서부터 10여 일 동안 합숙하면서 신궁(神宮) 건설을 위한 노동 작업에까지 동원되었다. 총독부 학무국은 학생에게 1년 가운데 3분의 1 기간을 근로 동원으로 식량 증산과 여러 작업에 참가하도록 하였고, 모자라는 수업은 일요일 또는 휴가에 보충할 것을 시달하였다.260)『매일신보』 1944년 3월 7일자. 근로 작업이 수학여행을 대신하였다.

여름 방학 동안 10일간의 근로 작업은 군인들의 군복, 셔츠의 소매, 양말의 수선 등 우리들 앞에는 얼마간 검은 빛이 도는 기름 냄새 짙은 딱딱한 군복 바지가 쭉 펼쳐져 있었다. …… 셔츠 소매의 단춧구멍을 감치는 일, 양말 뒷꿈치 꿰매기 등은 암만해도 생각대로 잘 되어지지 않았다.261)『숙명』 23호, 1940년 3월 : 『숙명 70년사』, 숙명 여자 중고등학교, 1976, 185쪽 재인용.

여학생은 위문 부대인지, 직공인지, 노무자인지 분간할 수 없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이전까지는 학교마다 특색 있는 교복을 입었으나 “국방적이요 실용적인 복장을 학도들에게 입혀 가지고 일상생활은 물론이요 일조 유사한 때에는 일본 제국의 학도다운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외에 물자와 경비를 절약하자”262)『매일신보』 1942년 3월 19일자.는 의도로 모든 학생은 통일된 교복을 입어야 했으며 1944년부터는 교복의 하의로 소위 ‘몸뻬’라는 통바지를 입어야 했다. 이제 학생은 공부는 고사하고 매일처럼 군복 만들기, 방공호 파기, 방공 연습, 모래 나르기, 위문대 만들기, 솔뿌리 캐기 등에 근로 대원처럼 동원되었다. 밤 12시에도 공습경보가 울리면 몸뻬를 입고 밖으로 나와 소방 훈련이나 사상자의 구호 훈련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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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군국주의 식민 통치자는 군국주의식 사고와 행동, 그리고 열등감을 학생들에게 배양하기 위해 각급 학교에서 일어를 상용하게 하고, 현역 군복과 같은 교복과 교모를 착용하도록 하였으며, 삭발시키고 서열화시켰다. 그리고 당번제, 일장기 게양, 신궁 신사 참배, 정오 묵도, 매주 5회 조회, 수시로 한국인 유명 인사를 동원한 강연회 개최, 근로 봉사 작업, 학내 미화를 통한 군국주의 정조 교육의 함양, 총력 발휘 실천, 국방헌금, 출정 군인 유가족 위문, 병상 장병 위문 등과 각종 학내 활동 중의 훈육을 통해 학생의 사고 영역까지 장악하였다.263)서재영, 「제도권 교육의 군사 문화적 성격에 관한 역사적 연구」, 연세 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1993.

이런 과정을 거쳐 학교 위생과 학교 체육은 완전히 전쟁 준비에 종속되어 체력은 군사 훈련을 위한 기초가 되었고, 학생의 체력은 개개인의 생활 목적이 아닌 국가가 요구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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