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3권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
  • 제3장 무식하면 짐승과 같습니다
  • 5. 군사 훈련장으로 바뀐 운동장
  • 학도 호국단
김정화

1970년대 들어 “체력은 국력이다.”라는 말이 유행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전국 체육 대회 치사에서 근대화 과정에 국민의 정신과 체력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오늘날의 체육은 다만 국민의 체위와 체력의 향상에만 그쳐서는 안 되며, 실로 유능한 민주 시민으로서 자질 함양이라는 중대한 사명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국내외로 직면해 있는 민족적 대과업 수행의 과정에서 우리는 이 체육 발전을 통해서 조국이 요청하는 이상적 인간상의 양성에 전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젊음과 미(美)’를 과시하는 이 ‘민족의 향연’을 통해서 우리는 개인보다는 겨레를, 집단보다는 국가를 위해서 공헌할 수 있는 정신을 길러 내야 할 것입니다. 참된 용기와 관용의 미덕, 단결과 협동의 정신을 익혀 나가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도자의 의지에 따라 문교부는 지덕체(智德體)가 겸비된 전인 교육의 일환으로 체력장의 실시와 소년 체전 개최 등 체육 시책을 마련하였다. 1972년부터 ‘자라나는 어린 국민의 체위를 향상’시킨다는 목적 아래 100미터 달리기, 멀리뛰기, 오래달리기, 던지기, 턱걸이(여자는 팔굽혀 매달리기), 왕복 달리기, 윗몸 일으키기, 윗몸 앞으로 굽히기 등을 종목으로 체력장 제도를 실시하였다.272)손인수, 앞의 책, 172쪽. 체력장은 고등학교, 대학교로 진학하기 위한 시험에 점수로 들어갔기 때문에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은 체력장을 준비해야만 하였다.

1977년 체력장 검사를 받던 여학생 세 명이 오래달리기를 하다가 심장마비를 일으켜 숨지는 등 사고가 발생하자 25단계로 나누어 시간에 따라 점수를 매기던 것은 통과 유무만 가리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개인의 체력도 입시 점수가 되었고 체육 활동도 입시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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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력장
체력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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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부터는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 나라도 튼튼”이라는 슬로건 아래 매년 봄 전국 소년 체육 대회를 열었다. 전국 소년 체육 대회의 성화는 신라 화랑의 본고장인 경주에서 채화하였는데 이것은 애국 충절과 협동 정신을 통하여 나라를 통일한 화랑의 얼을 계승해 국가관을 확립하고 주체성 있는 한국인상을 육성하고자 한다는 정책적 의도에서였다.

학교 조직의 병영화는 교련 훈련, 검열과 함께 학도 호국단의 조직을 통해 강화되었다. 분단 상황을 준전시 체제로 인식한 박정희 정권은 학원의 안정화를 위하여 학도 호국단을 결성하여 학생 조직을 중앙 집권적으로 통제하고, 북한에 대한 이념적 우위를 확보함과 더불어 체제에 순종하는 국민을 만들려고 하였다.

학도 호국단의 이러한 성격은 행동 강령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1. 우리는 배움과 수련에 전념하여 학도의 본분을 다하고 내일의 실력 있는 지도자가 된다.

2. 우리는 멸공 호국에 앞장서서 민족의 시련을 극복하고 조국 통일의 역군이 된다.

3. 우리는 민족사의 전통을 이어받아 겨레의 중흥을 이룩하고 자주와 긍지를 이 땅에 심는다.

학도 호국단의 결성은 1975년 베트남이 공산화되자 전국의 고등학교 이상 학생에 대한 안보 관념을 강화하고 또 이들을 전력화함으로써 국가 방위력을 증대시켜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베트남의 공산화로 북한의 남침 도발 가능성이 예상된다며 정부는 안보 강화 특별 담화를 통하여 온 국민이 반공정신과 애국심으로 무장하여 총력안보 태세를 갖출 것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정책에 따라 1975년 6월 7일 ‘학도 호국단 설치령’을 공포하여 전국 1,500여 개 학교와 학생 150만 명에게 배우면서 지키는 반공 학도의 사명을 다시 강조하였다. 이미 문교부 장관은 대통령 긴급 조치 9호의 배경을 설명하면서 “지금은 어느 때보다 국력의 집결이 요청되는 만큼 고등 교육 기관의 체제를 국가 안보의 차원으로 우리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바꿔 나가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273)손인수, 앞의 책, 1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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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 호국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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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면서 나라를 지키자”, “일면 면학 일면 호국”이라는 구호 앞에 학도 호국단 조직은 고등학교 이상 각급 학교의 남녀 학생 전원을 대상으로 하여, 교사도 지도 위원으로 조직에 참여하였다. 학도 호국단은 학교 단위로 조직하였지만 일단 유사시 쉽게 동원할 수 있도록 군사 훈련 편제와 같이 만들었다. 이러한 군사 훈련 편제는 평상시에는 교련과 각종 새마을 운동에 동원하고 전시에는 후방을 지키는 지역 방위 체제로 활용한다는 의도였다.

우리가 2학년이 되자 유신 체제하에서 학교도 학생회가 아닌 ‘학도 호국단’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모든 학교에서는 교련 검열을 하게 되었다. …… 교련 연습 때 집단으로 구령 반대 방향으로 반동을 한다든가, 군가를 돌림 노래로 만들어 버린다든가 하면서 지나치게 우리를 몰아붙이던 선생님들께 이유 많은(?) 반항을 몸으로 보이면서 우리들의 감동이 다소 무너지기도……274)금동지, “20년 만에 다시 새겨보는 하늘과 거울”, 『경북 여고 70년사』, 경북 여자 고등학교, 1999, 495∼4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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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련 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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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풍을 쇄신하고 정신력을 배양하며 배우면서 지키는 호국 학도로서의 사명을 완수한다.”는 기본 이념 아래 학도 호국단이 조직됨으로써 1960년 5월부터 1975년 6월까지 존속하던 학생회는 해체되었다. 문교부 장관은 학도 호국단을 만들면서 방만한 학생 조직을 재정비·강화하여 학원을 쇄신하고 정신력을 배양하며 청년 학도들의 예지와 일사불란한 단결로 내실 있는 자주 국방력을 강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밝혔다.275)손인수, 앞의 책, 189쪽. 학생회의 모든 활동은 물론, 서클 활동까지 학도 호국단 안의 각 부 활동으로 흡수하였으며, 학교 수업을 제외하고는 봉사 활동 등 학생들의 자율적인 활동을 모두 금지하였다. 국가 안보, 자주 국방이라는 이름 앞에 자율적인 조직은 방만하고 비효율적인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국가 비상사태에 대비할 수 있는 정신 전력을 연마’를 위하여 학생들은 극기 훈련을 떠 났으며, 반공 안보 교육의 생활화라는 이름 아래 자매 부대 방문이 연례적으로 이루어졌다. 남학교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자매 부대를 방문한 여학생은 군부대 시설을 둘러보며 직접 소총 사격도 해보았을 뿐 아니라 포크 댄스, 무용 등 위문 공연을 펼쳤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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