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3권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
  • 제4장 반비간에서 주방으로
  • 2. 반비간에서 주방으로
  • 입식 부엌 시대
김춘수

1966년 연탄 파동 이후 석유 보급이 빨라졌다. 석유곤로는 일찍이 1920년대 소개되었으나, 연료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보급이 늦어지다가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도시에서 연탄과 함께 중요한 취사도구로 자리 잡았다. 석유곤로는 취사용으로, 연탄은 난방으로 이원화되었다. 1973년 유류 파동(oil shock) 뒤 가스로 대체하자는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1974년에 국산 가스레인지가 개발되었다.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의 연료 변화를 정리해 보면 나무에서 연탄, 연탄에서 석유곤로, 석유곤로에서 가스로 옮아갔다. 이는 난방과 취사를 분리하여 부엌의 입식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상수도는 1970년대까지도 여전히 가정에 보급되지 않아서 주로 공동 수도를 이용하였다. 아침마다 공동 수도에서 물을 받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과 물지게를 지고 비탈길을 아슬아슬 올라가는 광경은 당시에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도시의 상수도 보급률은 1970년대 들어서도 60%를 약간 웃돌았다. 농촌의 하수도 보급률은 더욱 낮아서 오수를 마당까지 나가서 내다 버리는 것은 일상이었다. 영국처럼 산업화가 한창인 곳에서도 하수관 정비는 콜레라가 창궐하자 보건 위생의 문제를 들어 1842년 보건법 공포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상하수도의 보급은 위생적이고 능률적인 부엌, 근대화된 부엌을 상징하는 ‘입식 부엌’과 맞물려 이루어졌다. 수도가 집 안은 물론 부엌에까지 들어온 것은 위생 면에서 많은 진척을 보았다고 할 수 있으며, 부엌은 집의 한구석에서 한복판으로 들어올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기반 시설이 갖추어지는 것과 발맞추어 1960년대 초반부터 능률적이고 기능적인 부엌의 추구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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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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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은 바둑판같은 흰색 타일, 천장은 습기에서 방지하는 붙박이 아끄릴 형광등, 벽에는 접는 탁자를 붙여 놓아 조리를 할 때는 그것을 펴 놓고 한다. 츄립 꽃꽂이로 아늑함이 더한 이 부엌은 푸로판 가스를 이용하는 데다 바로 위에 환기 후드가 있어 정갈하기만 하다.291)『여원』 1966년 6월호.

‘모던한 단층 양옥’에 이와 같이 꾸민 부엌을 갖고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집을 구경시켜도 좋을 만큼 ‘모던’한 삶의 상징이었다. 당시 잡지에서는 ‘집 구경 산책’ 등의 코너를 마련하여 부엌을 통해 ‘모던’을 소비하는 데 열을 올렸다.

집의 한쪽 구석에 위치하여 밥만 짓던 곳에서 ‘가족 건강의 진원지’로 인식이 바뀌면서 부엌의 변화가 요구되었다. 곧 ‘가족 전원의 생산력을 준비하고 축적하는 장소’로서 부엌의 기능이 변화하였다. 이 속에서 주부는 가족의 생산력을 고도화시킬 수 있는 노동자로 자리를 잡았다. 공장 체제가 과학화되고 표준화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사회는 과학화와 표준화가 모든 것의 척도가 되었다. 가정에서 국가의 근대화 프로젝트를 담 당하였던 주부는 그것을 부엌에서 실현해 나갔다. 일제 강점기의 생활 개선 운동이 봉건 유습 타파를 앞세우며 부엌 개량을 주장하였듯이 이제는 국가가 근대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능률화·표준화의 이름으로 부엌의 개량을 선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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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의 모습을 한 부엌
연구실의 모습을 한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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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모로 쓸 수 있는 편리한 부엌’의 모습은 다음의 열 가지로 구체화되었다.292)표경조·주월왕, 『이상적인 가정생활』 2, 장왕사, 1963.

① 부엌인 동시에 주부의 연구실

② 잠깐 휴식할 수 있음

③ 빨래, 다리미도 이곳에서 할 수 있음

④ 간단한 식사도 여기서 할 수 있음

⑤ 책상인 동시에 조리대, 식탁으로 겸용

⑥ 안방 아궁이는 불판을 들고 구공탄을 넣고 평상시는 마룻바닥으로 넓 게 씀

⑦ 마룻바닥 밑을 약 1.5m 파서 여름, 겨울 각각 이용

⑧ 취사용 부뚜막을 따로 하여 노동의 수평으로서 편리함

⑨ 김 빼기로 연기, 냄새, 김 등이 빠져 나가므로 부엌이 정함

⑩ 개수대에서 곧 쓰레기를 버리게 되어서 편리함

모든 것은 수치화되었고, 주부가 노동하기에 가장 적합한 수치를 찾아내는 것에서부터 능률화·기능화는 시작되었다. 곧게 편 허리와 작업 동선으로 상징되는 능률화·기능화=입식 부엌=근대화의 담론이 양산되었다. 개수구가 있는 싱크대는 입식 부엌을 위한 필수 요소였다.

오토메이션화가 보급 안 된 영국과 불란서의 부엌을 참고로 미국에서 이 방면을 전공하고 돌아온 동생에게 설계의 도움을 받아 일하기 편한 높이의, 외국 부엌과 비슷한 부엌을 만들었어요. 냉장고나 TV를 집에 마련하였다고 문화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건 외국에서 얻는 생활의 자극입니다.293)『조선일보』 1962년 2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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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범 부엌
시범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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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접실 다음으로 부엌을 꾸몄다는 앞의 부엌 개량 체험 수기에서는 냉장고나 텔레비전을 집에 갖추었다고 문화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며 부엌 개량이 진정한 문화생활의 척도라고 강조하고 있다.294)『조선일보』 1962년 2월 6일자. 부엌 개량은 국가에서도 적극적으로 권장하였는데, ‘국민운동 본부 부녀과’에서는 1962년 5월 31일부터 ‘식생활 개선 센터’를 마련하고 이상적인 식사와 시범 부엌을 홍보·전시하였다. 이 전시회에서 제시된 시범 부엌의 모 습은 다음과 같다.

시범 부엌으로 선보인 부엌의 크기는 2평, 화덕 2개, 위에는 후드를 마련하여 연탄까스와 음식 냄새를 빼내는 환기 장치를 하고 스탠레스로 싱크(개수구)를 하였다. 싱크 아래에 만든 장은 바닥을 씨멘트로 해서 김치 항아리 등을 넣게 하고 문 위에 세로 창살을 하여 공기의 유통을 시켰으며, 싱크 위 왼쪽에는 주걱걸이용 못을 몇 개, 그 아래엔 행주걸이 막대기를 서너 개, 오른쪽엔 긴 나무에 질쭉한 구멍을 뚫어 칼꽂이를 만들었다. 옆으로 꺾여선 꽤 큼직한 카운터를 꾸미고 그 아래에 쌀뒤주를 장 모양 함께 붙여서 짰는데 속엔 함석을 사용하여 습기를 방지하도록 하였다.295)『조선일보』 1962년 6월 6일자.

후드, 환기 장치, 스테인리스 싱크는 시범 부엌의 성격을 잘 드러냈다. 공기의 유통과 각종 효율적인 걸이, 후드와 환기 장치는 스테인리스 싱크와 조화되어 부엌을 하나의 정밀한 공장 체제로 만들었다. 또한 부엌 개량을 위해 권고하는 기사가 잡지나 신문에 자주 등장하였다.

근래 주부의 가사 노동에 편리하도록 부엌을 개량하기 위해 주부들의 신장에 따라 작업대를 높여 일하기 편하도록 만드는 집들이 많아지고 있지만…… 레저나 바캉스를 위해 쓰는 비용을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부엌살림을 제대로 갖추고 청소하기 쉽게 조리대나 식기들을 관리할 수 있는 시설과 살림살이에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하겠다. 누구나 새집을 살 때는 밖에 바른 타일이나 벽돌 같은 외모보다는 부엌의 구조와 시설은 물론 변소를 보고 사도록 해야 하겠다.296)『조선일보』 1973년 9월 25일자.

이와 같이 1960년대 말부터는 식모를 두지 않거나 시간제 파출부에게 약간의 조력을 받으면서 주부 홀로 노동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 는 ‘돈을 아끼지 말고’ 부엌 개량에 투자하라고 권고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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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크대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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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부엌의 입식화는 아파트의 보급에 따른 주거 양식의 변화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아파트는 주택난의 심화 속에서 토지 이용률을 극대화하기 위한 주거 양식으로 1970년대 중반부터 고층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건설된다. 민간 건설업체들이 여의도, 강남 등지에서 고층 아파트 건설을 활발하게 진행하면서 공동 주택의 비율은 급격히 증가하였다. 아파트의 보급과 발맞추어 부엌의 입식화도 빠르게 진전되었다. 또한 1970년대 중반부터는 재래식 부엌을 서구식(입식) 부엌으로 개량하는 집이 많이 늘어났다. 이를 위한 방안으로 부엌 바닥과 조리대 개량에 대한 정보가 많이 제공되었다. 부엌 입식화의 관건이라고 할 수 있는 취사와 난방을 분리하면 부엌 바닥이 높아져 아궁이를 옮겨야 했다. 당시 온돌 겸용 연탄보일러를 통해 아궁이를 옮기지 않고 입식화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297)『조선일보』 1974년 4월 14일자.

입식화의 경향은 부엌 가구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였다. 부엌 가구의 역사는 1970년대 초 아파트의 등장과 짝을 이루어 시작되었다. 1970년대 초 국내 부엌 가구 메이커들은 일본의 스테인리스 싱크대 메이커와 기술 제휴 하여 일본의 재래식 ‘블록키츤’을 도입하였다. 블록키츤이란 싱크대·조리대·가스대 등을 종합 판매하는 것이다. 1980년대 들어 부엌 가구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국내 생산업체가 늘어나면서 부엌 가구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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