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3권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
  • 제4장 반비간에서 주방으로
  • 3. 여성의 공간
  • 상품 소비의 공간
김춘수

그추룩 핸 댕겨 신디 시집은 가난헤 원, 그땐 궂인 중도(: 궂은 줄도) 좋은 중도 몰르난 아무것도 어신 디(: 없는 데)…… 우리 시아버님네가 애기 여섯 오누일 난 살아도 자수성가 허연 살젠 해부난에 무시거 물려주커(: 물려줄 거) 어시(: 없이)…… 시집 가난이, 숟가락 두 개에…… 살렴(: 살림살이) 주는거 보난이. 사발 두 개에, 밥 낭푼 밥 퍼 먹을 거 하나에, 접시 하나에, 보시 하나에 이, 경 줘라(: 주더라). 그추룩 핸 주난 애기 난에 두 살 돼었주. …… 숟가락을 이젠 그 애기가 자파리 해비여(: 장난질을 해버려). 자파리 해불믄 이제 이녁 밥 먹을게 어서. 무신 접음(: 젓가락)을 허영 먹을 때냐, 무시걸 헌 때냐? 숟가락 하나, 국사발 하나, 밥사발 하나, 장 보시고 저 자리(: 돔)보시고 하나 놓민 먹었주……314)제주도·제주도 여성 특별 위원회, 고유을 구술, 『구술로 만나는 제주 여성의 삶 그리고 역사』, 제주도, 2002, 69∼70쪽.

숟가락 두 개, 사발 두 개, 밥 양푼 하나, 접시 하나로 첫 살림을 났다는 이야기에서 단촐한 부엌살림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으로 차리는 밥상은 국, 밥, 장, 그리고 돔 한 마리였다. 이렇다 할 먹을거리가 없고, 요리랄 것도 없는 이 시기의 부엌살림은 밥을 하기 위한 솥과 몇 개의 그릇이 고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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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상류층을 대상으로 부엌 용구의 상품화가 시작되었다. 상품은 대부분 일본에서 제작된 것을 소개하는 정도였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눈요깃거리에 불과하였으나, 상류층 여성은 이미 이러한 부엌 용구를 소유함으로써 근대적이고 문화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1950년대 들어 ‘문화생활’이 추구되고 ‘능률적인 부엌 용구’를 가지고 요리 솜씨를 발휘하도록 자극하는 글이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다양한 부엌 용구를 갖추려는 욕망이 증가하였다. 당시 신문을 보 면 표 ‘부엌 용구의 구분’과 같이 ‘보통 취사 용구’와 ‘문화적인 용구’로 나누어 소개하였다.

위생적이고 능률적인 요리를 위해 권장하는 부엌 용구들은 솥 하나, 그릇 몇 개로 식생활을 하던 우리의 음식 문화가 서구화되고 다양화되는 것과 관련 있다. ‘문화적 용구’인 오븐, 믹서, 커피 메이커는 말할 것도 없고, 조리 방법별로 용구가 다양화되었다. 과일이나 계란을 모양내기 위해 사용하는 나이프, 저울 등은 문화 주택과 문화생활을 서구화로 이해하였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러한 요리 기구를 갖춘 부엌이어야 문화적인 것으로 여겼다. 문화적인 부엌을 위해 별도로 저축하여 살 것을 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적인 부엌 용구’에 대한 추구는 본격적인 가정 기기인 전기 전자 제품 시대의 전주곡에 불과하였다.

1960년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각종 가정 기기가 생산되기 시작하였고, 1970년대 들어 활발히 보급되었다. 기업은 가정 기기에 대한 수요를 끌어올리기 위해 열중하였고, 심지어 1960년대 중반 잡지에는 할부 판매를 위한 ‘월부(月賦) 가이드’가 소개되었다.

<표> 부엌 용구의 구분
보통 취사 용구 문화적인 용구
- 밥과 국을 위한 남비 3개, 졸임용 남비 대중소 각 1개
- 푸라이팬 : 큰 것 1개, 작은 것 1개
- 중국남비 : 국남비 대용 1개, 다용도 1개
- 찜통 : 조금 큰 것
- 칼, 도마 : 비린 것에 쓰는 도마 1개, 야채용 도마 1개
- 빼띠 나이프, 구멍 주걱, 쇠 조리, 가는 뚝배기, 긴 대나무 젓가락, 강판, 계란 자르개, 밀방망이, 저울
- 오분(天火, 오븐)
- 냉장고
– 믹사(믹서)
- 빵 굽는 것
- 코피 메이코(커피 메이커)
✽『조선일보』 1959년 7월 19일자 .
✽이 시기 냉장고는 전기냉장고가 아니라 얼음 보관용 냉장고이다.

할부 판매 제도는 저소득 샐러리맨의 심리를 포착하여 상품을 판매하는 상술에서 나온 것인데 이 제도는 상인과 샐러리맨 쌍방이 모두 호의적으로 잘 이용하고 운영된다면 유익하고 편리한 방법임이 틀림없다. “가족 전체의 복리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아무리 필요한 물건이라도 그것이 어느 한 사람의 욕망만을 만족시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없는 살림살이에라도 가족 전체가 쓸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물건을 장만하여 가정을 이룩하여야 한다.315)『여원』, 여원사, 1966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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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광고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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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신세계 백화점에서 냉장고를 살펴보는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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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과 샐러리맨 모두에게 유용하였던 월부는 주부의 필요에 의해 지출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였다. 구입의 원칙은 가족 전체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월부 상품 가운데 냉장고의 인기가 가장 좋았다.

‘GR-120’이라는 금성 냉장고는 월부 상품의 대표격이었다. 월부 형식으로 가정 기기가 대거 보급되면서 부엌은 상품의 전시장으로 변모하였고, 주부는 상품 소비의 주체가 되었다. 누구에게나 보여 주고 싶은 부엌은 현대식의 가정 기기가 있는 부엌이었다.

가정 기기의 기계화를 주도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산업화에 따라 전자 산업이 발달하면서 국내 시장을 창출하고 제품 공급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식생활용 가정 기기의 개발 연도와 보급 추이는 표 ‘식생활용 가정 기기의 보급 추이’와 같다.316)김성희, 앞의 책, 76쪽.

<표> 식생활용 가정 기기의 보급 추이
단위 : %
기기
연도
1970 1975 1979 1983 1985 1987 1989 1991 1993
가스레인지 - - - - - - - 98.5 -
전기밥통 - - 73 75 85 81 86 66 61
전기밥솥 - - 53 61 72 69 72 64 48
전기남비 - - 6 - 14 - 12 10 10
토스트기 - - 4 - 5 - 5 9 13
전기곤로 - - 7 - 3 - 3 2 3
전기오븐 - - 7 - 5 - 6 4 6
전자렌지 - - - - 4 8 15 32 45
전기후라이팬 - - 26 36 45 49 58 51 54
커피포트 - - 26 - 51 - 53 47 43
약탕기 - - - - 4 - 17 23 27
냉장고 2.1 6.5 49 68 87 95 103 110 108
믹서 - - 38 45 56 59 64 65 69
쥬서 - - - 1 4 19 26 28 35
식기건조기 - - - - - - 7 20 30
식기세척기 - - - - - - - - 1
✽한국전력공사, 『가전기기 보급률 조사연구 』 , 1979·1986·1990·1992·1994.
✽통계청, 『인구 및 주택 센서스 보고』, 1970·1975.
✽통계청, 『가구 소비 실태 조사 보고서』, 1991.

가스레인지는 1974년에 개발된 이후 1991년에 전국 98.5%가 사용하게 되었다. 전자레인지는 1978년 개발되었으며, 냉장고는 1965년에 개발되어 1993년에는 108%를 보유하게 되었다. 식기세척기는 1988년에 개발되었으 나 1990년대 이후 보급되기 시작하였으며, 식기건조기 또한 1990년대 들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이렇듯 가정 기기의 보급은 전자 공업이 본격적으로 구축되면서 확산되었다.

그러나 개발 우선순위는 가사 노동에서의 노동 절약적 요구와 관계없이 진행되었다. 예를 들면 세탁기는 냉장고보다 늦게 개발되었고, 가장 힘든 노동을 해야 하는 식기 세척·청소 등을 대신할 가정 기기가 개발된 시기는 한참 뒤였다. 이로 보아 여성 취업의 증가나 가사 노동의 감소가 전자 제품 공급의 직접적인 계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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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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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크대를 필두로 한 부엌 가구, 식탁 등은 아파트가 보급되기 시작한 1980년대 이전부터 여성 잡지 광고를 통해 소개되었고, 이를 통해 부엌의 입식화는 가속도가 붙었다. 작업 동선에 의해 계획된 부엌 가구의 배치는 가사 노동의 효율성을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아파트는 브랜드화가 진행되고 유명 연예인을 전속 모델로 등장시켜 이미지를 통한 판매 전략을 취하였다. 이때 가장 강조하는 것은 첨단화된 설비가 갖춰진 아파트에서 오페라 같은 고급 문화생활을 즐긴다는 점이다. 여성을 상대로 한 아파트 광고는 1980년대와 1990년대 들어 증가하였다.

여성·아내를 생각하고 설계하였다는 아파트는 첨단 설계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런 첨단화된 공간에서 주부는 시장을 보지 않아도, 요리를 하지 않아도, 설거지를 하지 않아도, 무엇을 먹을 것인지 식단을 짜지 않아도 자동화된 아파트에서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으로 그려졌다.

부엌 용구 → 가정 기기 → 가전 기기·부엌 가구로 이어지면서 가사 노동을 위한 기계화와 자동화 수준이 변화하였다. 실제적인 측면에서 가사 노동의 기계화가 과연 주부의 노동 효율을 증가시켰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견해도 있다. 다른 측면에서 가사 노동의 기계화가 가정 내 재화와 용역의 자급도를 높인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로 이양되었던 가사 노동을 다시 가정 안으로 귀환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보기도 한다.317)김성희 외, 「가사 노동의 기계화 : 도입 과정과 배경」, 『한국 가정 관리 학회지』 제15권 3호, 한국 가정 관리 학회, 1997. 이렇듯 주부의 노동 효율을 높인다는 점에 기대어 확산되고 보급되었던 가정 기기가 얼마만큼 실제적으로 주부의 노동량을 경감시키는지 명확하지 않다.

다만 가정 기기의 보급은 우리나라의 전기·전자 제조업의 성장과 관련이 있으며, 가정 기기의 확산이 여성의 가사 노동을 줄여 준다는 당연한 전제 때문에 여성이 하는 가사 노동의 가치는 사회적으로 더 낮게 평가되는 이유가 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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