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3권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
  • 제4장 반비간에서 주방으로
  • 3. 여성의 공간
  • 부자의 부엌, 빈자의 부엌
김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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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의 종류(A-1형 토막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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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의 종류(A-2형 토막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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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의 종류(B-1형 토막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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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의 부엌은 설비보다는 규모나 사람 수로 이야기되었다. 소설 『토지』에서 최 참판 댁의 부는 “절간의 주방만큼 넓은”318)박경리, 『토지』 1권, 나남 출판, 2002, 24쪽. 부엌으로 묘사되는 것 처럼 대청과 부엌에 사람이 득실득실한 것은 그 집안이 얼마나 부유한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수사이다. 반면 가난한 자의 부엌은 작고, 문짝도 없으며, 공동으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부엌은 한 집안의 경제적 처지와 살림의 규모, 접빈객(接賓客)의 수에 따라 규모와 설비가 달랐다. 또한 도시화·산업화가 진전되면서 부엌의 크기는 물론이고, 독립적인 부엌을 소유하였는지가 가구의 안정도를 나타내는 척도가 되었다. 가정 기기의 소유 여부보다는 우선 부엌의 소유 여부가 빈부를 나누는 기초적인 준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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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혈 주택 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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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혈 주택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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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도시의 하층민인 도시 빈민의 시원은 1920년대 이후 형성된 토막민(土幕民)이다. 이들은 농촌에서 쫓겨나 도시 지역과 그 변두리에 모여든 사람이다. 1930년대 이후에는 토막민이 도시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의 농촌 지역으로 확산되었다.319)강만길, 『일제 시대 빈민 생활사 연구』, 창작과 비평사, 1987, 263쪽. 토막민의 집은 주로 토막·움막·움집 등의 이름으로 불렀다. 토막의 형태는 당시 도시 빈민 내부에서의 빈부 차에 따라 달랐다. 우선 토굴 형태에서 온돌이 설치된 한옥형까지 다양하였다.

토막의 여러 형태 가운데 A-1형은 다리 밑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가장 조악한 형태로, 부엌이 따로 없이 밖에서 취사를 하였다. A-2형은 내부는 방과 부엌 겸 헛간으로 되어 있다. 이 경우 비록 독립된 부엌은 아니지 만, 집 안에 부엌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한 단계 나은 주거 환경이다. B형은 방과 부엌이 구분되고 대부분 온돌이 깔린 토막이다. B형의 토막은 방 하나 부엌 하나의 형태로 1960년대 이후 판잣집이나 달동네 등에 거주하는 도시 빈민 주거의 원형이 되었다.

1960년대 이후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빈민 지역(불량 주거지)이 사회 문제로 다시 등장하였다. 6·25 전쟁의 와중에서 형성되기 시작한 소위 ‘판자촌’은 1960년대 이후 재개발 바람을 타고 철거, 강제 이주 그리고 양성화를 반복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3년의 조사에 따르면 영세민의 경우 1인당 평균 건평이 약 0.5평이었다. 전체 조사 가구 가운데 방 한 개(2∼4평)를 쓰는 가구가 약 60%, 두 개를 쓰는 가구가 32.1%이며, 세 개를 쓰는 가구는 약 7% 정도에 불과하였다.320)한국 기독교 사회 문제 연구원 편, 『한국의 가난한 여성에 관한 연구』, 민중사, 1983, 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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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잣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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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잣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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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잣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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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주거 환경에서 부엌은 주로 쪽마루에 곤로나 연탄을 이용해 취사를 하거나,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공간을 임시 부엌으로 이용하였다. 이들 빈민 지역 주택은 오랫동안 필요에 따라 공간을 넓히고 자투리 공간을 활용함으로써 좁은 공간을 바꾸어 가며 유지되었다. 1991년에 이루어진 한 조사에 따르면 이들 지역 주민은 대부분 세대별로 부엌을 가지고 있으나 일부는 세 세대나 두 세대가 함께 쓰기도 하였다. 또한 별달리 부엌이 없이 아궁이를 중심으로 살림살이를 늘어놓고 부엌으로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부 엌 위 공간을 창고로 쓰거나 다락을 설치하여 아이들 방으로 만든 경우도 많았다. 취사용 연료는 가스레인지와 연탄을 사용하였으며, 가전제품을 쓰는 경우는 드물었다. 가전제품은 구입의 한계뿐만 아니라 전기 요금을 지속적으로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극히 제한되었다.321)양윤재, 『저소득층의 주거지 형태 연구』, 1991, 열화당,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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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옥 개조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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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옥 개조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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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동네’는 주로 가족을 단위로 기본 생활이 유지된다. 반면에 독신 집단 주거 공간은 부엌이 있는가 없는가를 기준으로 명칭이 달라진다. 부엌이 달려 있는 단칸방은 닭장집, 벌집이라고 부르고, 부엌이 없으면 쪽방이라고 부른다. 닭장집, 벌집의 부엌은 취사 공간일 뿐 아니라 세탁을 하거나 세면과 간단한 목욕까지 하는 공간이다. 이런 공간은 1960∼1970년대 농촌에서 단신으로 이농한 노동자의 삶터가 되었다. 이들 이농한 단신 노동자의 주거 공간은 임시적이고 열악하였다. 신경숙은 소설 『외딴방』에서 구로 공단의 여공이 거주하였던, 독산동의 비탈길에 있던 동료의 집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윤순임 언니가 골목에서 네 번째쯤 되는 집을 가리킨다. 단층이다. 열린 대문을 밀고 들어가니 방문 앞에 101, 102가 써져 있다. 방은 열 몇 개쯤 되고 복도식으로 되어 있다. 복도에 곤로들이 나와 있다. 곤로 옆에 냄비 며, 조리며, 그릇을 엎어 놓은 바구니들이며…… 부엌을 못 가진 살림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다.322)신경숙, 『외딴방』, 문학 동네, 1995, 352쪽.

부엌을 못 가진 살림들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늘어서 있는 집은 마당이 있고 가족이 있던 농촌의 집과 대비되어 외로운 노동자의 생활을 그대로 보여 준다. 부엌이 있는 닭장집이나 벌집은 그나마 나은 축에 속하였다. 쪽방은 잠만 자는, 임시적인 공간이었다. 이런 부엌이 없는 집에서 산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열악함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신경숙은 “두 사람이 나란히 서면 돌아보지도 못할 부엌”에서 오빠, 외사촌과 함께 “첫 밥을 지었다.”323)신경숙, 앞의 책, 184쪽.고 회상하였다. 쪽방은 지금까지도 일거리를 찾는 사람들의 임시 거처로 남아 있다. 2000년 현재 전국적인 쪽방 실태는 표 ‘쪽방 지역 현황’과 같다.

가난한 사람들은 여관, 여인숙, 하숙, 저소득층 주거지를 쪽방으로 이용하였다. 쪽방 거주자는 일거리가 많은 도심에서 살면서 교통비를 절약하였다. 그리고 쪽방에 거주하는 대다수는 언젠가 이곳을 떠나 부엌이 있는 집에서 가족과 함께 살기를 희망하였다. 가난한 사람에게 부엌이 있는 집은 가족과 함께 살 수 있는 삶을 의미하였다.

한편 1984년부터 저소득층의 주택 안정을 위해 다세대·다가구 주택 건설이 추진되었다. 다세대·다가구 주택은 각 세대별로 방, 부엌, 화장실, 현관과 세대 전용 상하수도 설비를 구비하도록 법제화되었다. 그러나 주택난 해소를 위한 다가구 주택의 건설은 주거 공간의 지하화를 불러왔다. 지하실을 이용한 주거 공간의 확장은 “주택난 해소와 함께 좀 더 아름다운 도시를 만드는 데 일조”하였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비가 조금이라도 많이 내리면 빗물이 넘쳐 거실로 들이쳐서 장마철마다 다세대·다가구 주택 주민의 피해가 주기적으로 나타났다. 여름철 장마 때마다 물에 젖은 세간을 말리는 광경은 아직까지 우리에게 익숙하다. 또한 다세대·다가구 주택은 가난한 사람에게 독립적인 주거 공간을 제공해 주었지만, 채광·통기·습도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각종 질병이 만연하였고, 당시까지만 해도 연탄을 취사와 난방 연료로 사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연탄가스 사고는 단골손님으로 찾아왔다.

농촌의 주거 상황 또한 도시 빈민의 주거 환경과 마찬가지로 열악하였다. 열악한 주거 환경은 부엌 시설에서 가장 크게 드러난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농촌 지역은 부엌 시설이 거의 갖추어지지 않았다.

<표> 쪽방 지역 현황
단위 : 개
지역 쪽방 수 비고



서울 종로구 돈의동 600  
종로구 창신동 450 인근 여관, 여인숙 등 유사 거처
중구 남대문로 5가동 929 인근 여관, 여인숙 및 월세방 등 유사 거처
용산구 동자동 700  
영등포구 영등포동 820 인근 여관, 여인숙 등 유사 거처
대구 중구 태평로 2가동 300 여관, 여인숙 형태의 쪽방
동구 신암동 300 인근 여관 등 유사 거처
대전 동구 정동 1,000 인근 저소득층 주거지 및 여관, 여인숙
동구 선화동 600  



부산 동구 일대 1,500 여관, 여인숙, 하숙 등의 형태로 여관촌에 분산되어 있거나 저소득층 주거지 내에 단신 거주자가 다수 분산되어 있음.
인천 부평구 부평동 300
효성동 등 300
수원 세류동 등 200
8,199  
✽서울특별시·보건복지부, 『 쪽방지역 실태조사 및 효율적인 정책 개발』, 2000, 15쪽.
✽서울은 돈의동 상담소, 남대문로 5가동 상담소와 노숙자 다시 서기 센터의 자료.
✽지방은 지방 방문 조사와 지역 단체의 의견 종합
✽분산 지역의 추정치는 매우 불확실

표 ‘농촌 지역의 부엌 시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집 안에 펌프나 우물 등의 식수원을 가지고 있어도 부엌까지 수도를 끌어들여 사용하는 가구는 드물었으며, 하수도가 있는 가구는 더 적었다. 농촌에서는 1980년대 초반까지도 대부분 부엌과 우물을 들락거리며 물을 길어 오고, 사용한 물은 부엌 밖으로 그냥 내버림으로써 비위생적인 환경을 만들었다. 시멘트나 나무를 이용한 조리대가 있는 가구도 적어서 많은 여성이 부뚜막이나 부엌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음식을 조리해야 했다. 최근까지도 도시 빈민과 농촌 지역에서 근대적인 부엌 시설을 갖추지 않은 곳을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경제력에 따른 부엌의 열악함은 부엌 용구나 가전제품의 소유 여부와는 별개로 가난한 여성이 처한 가사 노동의 고단함을 보여 준다.

부자를 묘사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최첨단 설계의 아파트에서 시스템 가구가 들어갈 정도의 넓은 부엌을 가진 집’이라고 묘사한다면 의심하지 않고 부자의 집, 부자의 부엌이라고 생각한다. 1989년의 『신동아』 기사는 부자의 부엌과 가난한 자의 부엌이 어떻게 우리 사회에 공존하는지 잘 보여 준다.

<표> 농촌 지역의 부엌 시설
시설 내용 없다 있다
집 안에 우물(펌프, 수도) 25(17.48) 118(82.52)
부엌에 수도 126(88.11) 17(11.88)
부엌에 하수도 138(96.50) 5(3.50)
입식 조리대 120(83.92) 23(16.08)
부엌과 방 사이의 문 56(39.16) 87(60.84)
연탄 난방 107(74.83) 36(25.17)
석유곤로 41(28.67) 102(71.33)
✽한국기독교 사회 문제 연구원 편, 『한국의 가난한 여성에 관한 연구』, 1983, 184쪽.
✽( ) 안은 백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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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의 우물가
농촌의 우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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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노원구 하계동 ‘양돈 마을’ 사람들은 돼지우리를 개조해서 살고 있다. 판자와 블록, 천막과 슬레이트로 대강 모양만 갖춰 놓은 집들,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만한 골목엔 빨래들이 널려 있고 아이들과 개들은 그 골목을 마당 삼아 어울려 놀고 있다. 10여 세대가 공동변소를 같이 쓰는데 아침이면 다급한 노크 소리가 요란하다. …… 이곳의 어린 아이들에게는 아파트가 곧 부의 상징으로 인식되는 듯, 이 다음에 잘살게 되면이란 뜻으로 “이 다음에 아파트에 살게 되면”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324)강영진, 『신동아』 1989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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