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3권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
  • 제4장 반비간에서 주방으로
  • 4. 주부의 탄생
  • 조력자들
김춘수

산업화의 진원지였던 영국에서는 주거 환경을 개선할 때 부엌 설비의 발전 속도가 아주 느렸다. 그것은 값싸게 하인을 고용할 수 있었고 모든 가사 노동을 이들이 전담하였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에 이르러서 하인이나 가정부를 고용하기가 어려워지고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면서 비로소 가정부인들은 부엌 설비를 개선할 필요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영국보다 하인 고용이 어려웠던 미국에서는 부엌의 설비와 공간 배열에 대한 연구가 빠르게 진행되었다.325)손세관, 『도시 주거 형성의 역사』, 열화당, 2000, 253∼256쪽. 이렇듯 부엌 설비와 공간에 대한 개선은 가사 노동의 담당자 변화와 큰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1970년대 말까지 중간 계층 이상에서 주부의 일은 시부모 공양, 친척이나 손님 접대를 포함한 집안의 대소사 관리, 자녀 양육이었고, 음식 만들기·빨래·청소 등 단순 가사 노동은 식모 또는 가정부가 담당하였다. 1970년대까지의 여성 소설에서도 ‘어멈’ 또는 ‘식모’가 주요 가사 노동 담당으로 등장하였다. 가사 노동 조력자의 감소는 1960년대 말부터 뚜렷하게 나타났다. 사회적으로 가정의 일은 주부가 직접 해야 한다는 인식의 확산은 식모로 일컬어지는 가정 고용인 감소를 자극하였다. 또한 미혼 여성들이 제조업으로 고용이 흡수되고, 교육 기회가 확대되면서 식모의 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로써 1983년 무렵에 이르면 중산층 주부의 73.7%가 직접 가사 노동을 하게 되었다.326)윤복자, 「한국 부엌의 작업대와 수납장의 표준 치수 설정을 위한 연구」 1, 『대한 가정 학회지』 53, 대한 가정 학회, 1983, 79∼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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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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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사회에서 가사 노동을 수행하는 주체는 가장 사회적으로 낮은 신분 계층이었다. 이들은 주로 여성인 비(婢)였다. 노비들은 밥 짓기·바느질·청소·육아·가족 돌보기·난방 관리·집안 수리·장보기 등 오늘날의 주부가 하는 가사 노동과 유사한 노동을 수행하였다. 이들은 주부를 대신하여 고된 육체적 노역을 하였지만 노동 가치는 천민이라는 사회적 지위로 인하여 높게 평가받지 못하였다.327)김성희, 앞의 글, 153쪽. 노비를 소유하지 않은 경우 ‘하층 계층의 여성은 대부분 가정의 노예’328)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이인화 옮김,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살림, 1994.였다. 하층 여성들은 가사 노동과 경제 활동을 병행하기 위해 자신의 딸을 가사 노동의 조력자로 삼았다. 하층 여성의 딸들이 아주 어린 나이에 집안일을 하게 되고, 가계를 책임지는 일은 산업화 시기에도 그대로 이어져 소위 ‘살림 밑천으로서의 맏딸’ 노릇을 해야만 하였다.

노비 제도가 1894년(고종 20) 이후 폐지되면서 가사 노동은 노비에서 가사 고용인 형식으로 유지되었다. 공식적 신분제가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사 고용인의 처지는 노비와 다르지 않았다.

도회지에서는 월 3원만 받아도 식모나 그렇지 않으면 계집애 하나쯤은 으레히 두고 지내는 것이 오늘의 수입은 적고 지출이 많이 나는 우리 일상생활의 실상입니다. 그런데 수입이 적은데도 불구하고 으레히 식모를 두어 야만 행세를 할 줄 아는 그 관념에 병이든 것이지 수입만 괜찮다면 사실에 있어서 식모같이 싼 것이 어듸 있겠습니까. 여관집 같은 데서는 월 5원, 보통 여염집에서는 많아야 4원, 3원. 이것도 어린 계집아이쯤 되고 보면 철따라 옷가지나 해주고 밥만 먹이고 부릴 수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렇고 보니 사람만 잘 만나고 보면 이 얼마나 값싼 노동입니까.329)『조선중앙일보』 1936년 4월 3일자.

이와 같이 값싼 임금 때문에 중상류층이 아니더라도 도회지의 월급쟁이까지 식모를 둘 수 있었다. 그리고 농촌에서 올라온 어린아이나 대대로 그 집에서 부리던 하인의 자녀가 그대로 남아 가사 고용인이 되었다.

옛날에는 전화도 없고 전보도 없고 똑 하인이 가거든. 정자지기나 공소지기나 토질 부치고 심부름도 해주고 가마도 메고 하든 사람이지. 그때 우리 큰집에는 오새 식모 긑이(: 같이) 담살이라고(: 어린 여자 시중꾼) 있었어. 처음에는 종이랬고. 양반집 규수가 시집갈 직에는 하나씩 몸종으로 데루 가. 문서(: 종 문서)를 가져간다네. 한평생, 대대로 자기 자식 낳으만 또 바치고 또 바치고, 종은 문서 있는 종이래. 우리 시집올 때는 그거는 없으이께네 담살이가 있었제. 살림이 자꾸 기울어져서 형세가 못해지이께 담살이 없어졌제.330)구술 성춘식·편집 신경란, 앞의 책, 51쪽.

이처럼 종 문서가 없어진 다음에도 노비의 자손은 시집가는 주인집 딸의 종으로 딸려 보냈다.

1970년대에는 가사 고용인 수가 40% 내외로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농촌을 떠나온 어린 여성들은 남의집살이를 통과 의례로 거쳐야 했다. 어린 소녀들은 농촌에서 이미 손이 곱도록 노동을 경험하였다. 이 소녀들이 도시로 올라오게 되는 이유는 ‘맏딸’로서의 책임 의식이 크게 작용하고 있으나, 산업화에 따른 대중 사회의 출현으로 도시에 대한 동경과 희망이 함 께 작용하였다.331)1968년 부녀 상담원에서 여성 상경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20세 미만이 대부분이고, 장녀가 가장 많았으며, 경제적 어려움이 상경의 가장 큰 이유였다. 희망 직업은 직공이 식모보다 두 배 이상 많았다(『주부 생활』 1969년 12월호). 농촌에서 입을 덜기 위해 도시로 보낸 어린 소녀들은 도시에 적응하고 보수가 있는 다른 곳으로 옮길 때까지 식모로, 아기 보는 아이로, 심부름하는 아이로 중류층 이상의 가정에서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받으면서 생활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신문의 사회면은 ‘유괴 식모’, ‘악덕 식모’, ‘살인 식모’ 등으로 범죄와 연관된 부정적 이미지가 장식하였다.332)『조선일보』 1965년 8월 15일자. 가정주부의 역할과 관련되어 이야기된 식모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이후 시간제 파출부와 가정부를 양성하고 고용하도록 하였다.333)대표적으로 YWCA와 직업 보도소는 보건 사회부와 서울시의 후원 속에서 약 6개월 정도의 훈련을 거쳐 가정부 양성 사업을 시행하였다(『동아일보』 1967년 2월 23일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0∼1970년대는 입주제 가정부에 대한 요구가 많았고, 주부는 전반적인 관리자로서 위치하고 있었다. 1980년대 들어 입주 가정부는 크게 감소하는데 당시 가사 고용인은 하층 기혼 여성이 대다수를 차지하였으며, 파출부나 시간제 가정부의 형태가 많았다. 도시 빈민으로 거주하는 기혼 여성의 많은 수가 ‘아파트’에 가서 파출부나 가정부를 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334)강명순, 『빈민 여성 빈민 아동』, 아침, 1985,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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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옥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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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층 가정에서는 숙식을 제공해야 하고, 가족 구성원과는 다른 ‘부엌 식구’나 ‘부엌 아가씨’보다는 출퇴근을 하는 파출부나 시간제 가정부를 요구하게 되었다.

가사 고용인의 감소는 주부의 역할을 규정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즉 주부는 가정 관리자이자 노동자가 되어야 했다. 주부 혼자서 가사 노동을 하게 되면서 가정 기기 도입이 확대되었다. 가정 기기의 확산은 가사 노동을 주부가 전담하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광고는 “식모도 필요 없고, 엄마는 가사에 전념할 수 있다.”라든가 “식모를 대신하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소비를 유발시켰다. 부엌 시설의 개선과 가정 기기의 도입은 식모로 대표되는 부엌일의 담당자들을 밀어 내고, 주부로 하여금 그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식모 고용의 비근대성과 비효율성은 산업화 시기 내내 이야기되었다. 전통 사회에서 부엌일을 담당하던 노비들이 가사 고용인으로 바뀌었어도 이들이 가정 바깥 사람으로, 외부인으로 이야기되지는 않았다. 식모 고용에 대한 부정적 언설은 산업화 시기 가정주부를 탄생시키는 지배 담론으로, 근대적 부엌과 가정주부를 연결시켜 근대 가족을 완성하고자 하는 근대 기획의 한 가지였다. 또한 가정의 근대화는 부엌의 근대화를 척도로 하였고, 이것의 종합은 국가의 근대화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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