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3권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
  • 제4장 반비간에서 주방으로
  • 4. 주부의 탄생
  • 주부의 탄생
김춘수

일제 강점기 지식인은 여성을 새로운 국민을 양성할 완전한 모성으로 이야기하였다 .

어너 민족의 흥망이든지 문명이 고하되는 일반의 이류는 전혀 여성의 흥망 여하에 잇는 것이다. 성장과 진화, 위축과 퇴화, 여성의 운명 여하에 따라 민족의 운명이 좌우되는 것이다. …… 여성을 모성의 의미에서 이탈시키면 그도 역(亦) 아무 존귀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 여성들아 그대들은 남성이 안이다. …… 조선에 새 국민이, 새 생명이 필요한 이상 완전한 모성이 필요하다. 여성은 모든 논박을 듯지말나-다 못 어머니라는 것-조흔 어머니-새 국민 어머니-라는 것을 명심하라. 여성들아, 조선의 여성들아, 피를 뽑아 맹서하라. 완전한 새 국민의 모성이 되기를……335)이은상, 「조선의 녀성은 조선의 모성」, 『신여성』 3권 6호, 1925년 7월, 2∼6쪽.

계몽 담론에서 참된 신여성의 전형으로 강조하는 ‘어머니’는 일터도 모성됨을 방해한다고 하여 가정주부만이 여성의 역할이라고 할 정도였다. 1920∼1930년대 들어 여성은 국가와 민족 구성원으로서 가정에서의 생활 개선 운동의 주체로 호명되었다.

내가 참으로 여자가 되얏다면…… 가뎡에 들어가 안온한 생활에서 가정을 정리하겟슴니다. 그럿치만 그것이 다만 안락한 가뎡 생활을 탐하기 위하야 그런 것이 아니고 자긔 가뎡을 정리하는 동시에 적어도 전 조선의 가뎡이 다 가티 정리되도록 생활 개선이라던지 자녀 양육이라던지 경제 향상이라던지에 힘쓰겠다.336)염상섭, 「내가 여학교를 졸업한다면 : 먼저 가정을 정리하고」, 『신여성』 3권 3호, 1925년 3월, 19∼20쪽.

생활 개선 운동 과정에서는 개량되지 않은 부엌을 전근대의 상징으로 여겼다. 또한 부엌에 대한 천대는 여성에 대한 천대라고 신여성들은 반박하였다. 신여성들은 생활 개선에서 부엌 개량을 주장함으로써 전근대와 결별하였고 여성 천대라는 당시의 관념에 도전하였다. 부엌이라는 공간과 그 공간에 일하는 노동 주체가 일치하지 않았던 시기에 부엌 개량 주장은 신여성들이 봉건적이고 전근대적인 조선을 벗어나고자 했던 현실을 상징하였다. 조선적인 것은 미개하고 전근대적이며, 근대적인 위생·영양·노동력의 효율적 사용이라는 덕목이 확대되었으나 이것의 효과는 일제의 옥외 노동 장려 정책에 포섭되기도 하였다.

또한 신여성들은 당시 태동하기 시작한 의료 체계와 과학화·규율화의 시대 상황에서 과학 담론의 배포자였던 지식인과 의사들의 관리하에 과학적이고 위생적인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주장하였다.337)‘부억에는 저울을 두시오. / 부엌에 대한 천대는 여자에 대한 무시’, ‘부엌일에도 비누를 쓰자, 행주도 맹물에 빨면 정결하지 못하다.’(『조선중앙일보』 1934년 12월 7일자), ‘부엌의 개선은 행주에 있다.’(『동아일보』 1939년 4월 14일자), ‘깍는 것만이 장끼가 아니다─부억에는 저울을 두시오’(『동아일보』 1933년 12월 3일자). 이러한 과학화의 요구는 일제 말기 군국주의화가 강화되면서 ‘체위 향상과 절약 장려’라는 일제의 언설에 포섭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나치스 부인 운동이 단순히 정치 운동의 범위에만 머물러 잇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단연 가정생활 속에 파고들어 나치즘의 철저를 꾀하려는 것으로서 요리 제조표의 특징은 최소한도의 재료를 이용하여 칼로리 많은 음식을 만들게 하는 점이라고 합니다. 이것으로써 나치스 당은 부인네의 부엌까지 전체주의화하여 체위 향상과 절약 장려의 효과를 한꺼번에 얻으려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338)『동아일보』 1939년 3월 30일자.

신여성은 부엌을 직접 노동하는 공간이 아니라 구여성과 자신들(신여성)을 구분하기 위한 계몽의 공간으로 인식하였다. 값싼 식모 노동이 풍부하고, 이들의 노동 공간이었던 부엌은 가정과 안주인인 신여성의 근대성 여부를 확인하는 장소였지만 노동의 공간은 아니었다. 따라서 당시에 식모에 대한 태도는 온정주의적이었다.

그런데 가정에서 등은 이렇게 싼 식모를 너무도 가혹하게 부리는 것입니다. …… 인정의 나라라는 조선에서는 너무나 무색한 일이 아닙니까. …… 저기 미국에서는 공일날이면 으레이 집안에 일하는 사람들을 다 놀려 주는 것이 그들의 습관입니다. 그래서 공일날이면 아침가지만 보아 주고 나서 외출을 하든지 누어서 쉬든지 마음대로 합니다. 그러면 점심부터는 주인이 자기를 손수 저녁까지 다 맨든답니다.339)『조선중앙일보』 1936년 4월 3일자.

당시 여성들은 스스로를 부엌일의 담당자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관리자로서의 역할과 정신노동에 한정하였다. 이 시기 가정 중심성은 미약하였으며, 가사 노동의 주체로 주부의 존재는 확실하지 않았다.

부엌일의 담당자로 근대적 의미에서 주부의 노동이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데는 주부라는 용어의 보편화 현상과 관련되어 있다. 1956년 월간 『주부 생활』이 창간되고, 신문에는 주부의 일상생활에 관련된 내용이 주부 노 트, 주부 수첩, 주부 경제라는 이름으로 고정면에 실렸다. ‘내가 그리고 싶은 주부형’이라는 기사를 통해 주부의 바람직한 이상형을 그리기도 하였다.

주부란 가정이란 자체 안에서는 바로 그 가정의 주무를 맡아 가지고 처리해 나가는 가정 구성원의 그 중 중요한 업무이다. 남편이 그 가정을 다스리는 동력원이라면 주부는 바로 그 가정을 원활히 움직여 나가는 동력인 것이다. …… 주부의 무대는 대내적이니 만큼 자신이 직접 남편의 맞는 바람을 맞는 건 아니지만 그런데도 주부가 겪어야 하는 바람은 남편의 맞는 그것의 몇 갑절은 더 맞게 마련이다. 따라서 실의에 맞아들인 남편에게 용기를 내게 하고 한편으로는 뒤틀린 사림을 그런대로 풀어 나가야 할 사람은 바로 주부이기 때문이다.340)『조선일보』 1961년 10월 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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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생활 도구를 이용한 저울
1960년대 생활 도구를 이용한 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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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관리자로서의 주부는 부엌 설비 개선을 통한 근대화나 가계부의 작성, 계절별 살림 운영을 체계적으로 담당해야 하므로 곧잘 ‘내무부 장관’으로 비유되었다. 저울 사용과 가계부 쓰기는 당시에 과학적이고 계량적인 가계 운영을 상징하였다. 1960∼1970년대 가정에서 필수품이 된 저울의 사용은 손맛을 대신해 재료의 정확한 측정이 음식 맛을 결정한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식생활 개선의 첫걸음은 합리화 곧 과학화에 있으며 이는 저울의 사용”에 달려 있었다.

저울과 함께 생활 개선의 기초는 가계부 작성에 두었다. 가계부는 일종의 ‘생활 혁명’을 위한 무기였다.

밤 예비 사이렌이 불 무렵이면 남편 대신 내가 책상머리에 마주 앉았다. 하루하루의 금전 출납을 아이들이 쓰다 남은 공책에 적어 넣기 위함이다. 쌀값, 찬값, 탄값은 거의 매일 지출되었다.

남편 잡비와 아이들의 용돈을 표시하는 작대기에는 붉은색을 칠하여 곧 눈에 띄도록 경각심을 높여 주었다. 과연 6월에 들어서서는 남편의 잡비가 반으로 줄어들고 아이들은 서로 용돈을 안 타 쓰겠다고 장담을 하기 시작하였다.341)「나의 생활 수기」, 『여원』, 1961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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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관리자
가정의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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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색으로 그달 그달의 성과표를 만들어 경각심을 높이는 모습은 마치 경제 개발 계획의 목표 달성을 위해 성장 그래프를 그리던 ‘근대화 프로젝트’ 실천 모습과 닮아 있었다.

여성 잡지들은 앞을 다투어 가계부 작성에서 ‘회계 시기를 어떻게 잡아야 하는가’라는 강좌를 개최하기도 하였고, 각종 가계부 작성 성공담을 공모하였다. ‘가계부를 잘 쓰는 사람’이 곧 ‘살림을 잘하는 주부’로 인식되었다.

회계 장부를 연상시키는 꼼꼼한 가계부 작성은 가정을 이끄는 주부의 훈장과도 같았다. 주부의 등장은 “가정에 있는 여성이 가장 아름답다.”는 남성주의적 담론으로 포장되었다. 같은 연재물에서 소설가 이종환은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제아무리 금은보석으로 치장을 하였을망정, 치맛자락으로 거리를 휩쓸 고 다니는 여성에게서 별반 대단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흔히 말하듯이 부엌에서 희생을 하는 것만이 훌륭하다는 것은 아니지마는, 어쨌든 여성은 가정에 있어서야만 비로소 진정한 미의 여왕이 될 수 있다는 사실만은 어쩔 수 없다. 결국 내가 그리고 싶어 하는 ‘주부형’이란 곧 내가 이상으로 하는 주부형일지는 모르나 ‘주부를 천직으로 아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언제고 한번 써 보고 싶은 것이다.342)『조선일보』 1961년 10월 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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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상 시상식
주부상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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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가정 안에 있을 때 가치가 있다는 주부상은 일제 강점기 부엌의 개량을 통해 근대성을 획득하려던 신여성과 지식인이 이야기하는 주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무엇보다 이 시기 여성은 어떻게 사회가 규정하는 바의 ‘주부상’을 내면화하였을까? 주부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사회적 공감대가 확보된 것은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로 보인다.

가정 경영에서 밥 짓기, 찬 만들기, 고급 요리, 청소, 세탁, 의류 정리, 바느질, 집안 정리, 실내 미화, 자녀 교육, 보육, 남편의 비서, 섭외, 남편에 대한 서비스, 가족 위안을 위한 프로듀서, 가족의 주치의, 간호원, 집수리를 위한 목수·미장이 구실, 사업가 남편의 자본금 조달343)『여성동아』 1968년 7월호.

당시 여성의 가사 노동은 육체노동에서 정신노동에 이르기까지 폭넓고 다양하였다. 여기에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의 밥을 손수 짓고, 옷을 빨아 정성스럽게 손질하고 보살피는 일이 얼마나 보람 있고 즐거운 일이겠는가.”는 주장이 더해지면서 주부의 역할은 정서적 가치까지 아울러서 강화되었다.344)『여성동아』 1970년 4월호. 부엌 개량을 중심으로 한 생활 개선의 정당성은 이러한 부엌의 노예 상태에서 여성을 해방시킨다는 데 초점을 두었다.

과학이 극도로 발달되어 전기와 까쓰를 이용하여 각양각색의 음식들을 조리하며 세탁과 다림질도 기계 혼자서 해 낼 수 있는 오늘날 홀로 우리나라만이 오랜 시일의 생활 경험과 단지 습관적으로 하는 암중모색적(暗中模索的)인 방법으로 살어 왔고 또 현재도 그렇게 살어 나고 있기 때문에 수많은 여성들이 남성들의 노예라기보다도 오히려 부엌의 노예로서 한참 즐기어야 할 시기의 태반의 시간을 아니 전 생애를 부엌에서 왔다 갔다 하는 낭비와 세탁과 밥 짓기로 보내는 비극적인 운명을 되풀이하고 있는 현상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이제 나는 여성들이 교양 시간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이에 따르는 퇴보와 향상 없는 불행의 근원은 부엌으로부터 해결지을 수 있다고 보아 가장 적은 시간과 노력으로 최대의 성과를 올리는 동시에 부엌은 어데까지나 주부들의 흥미와 쾌락을 가지고 연구할 수 있는 연구실이며 실습실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345)부녀국, 『새살림』 제7호.

주부가 일하는 부엌은 부엌일을 흥미롭고 쾌락을 가지면서 연구할 수 있도록 시설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부엌이 개량되어야 일을 하는 주부가 편하고, 결국 가정이 안정됨으로써 남편이나 가족이 모두 편안하게 된다는 주장을 통해 개량의 정당성을 찾기도 하였다.

한편 위생, 편리, 능률이라는 지배 담론을 통해 열량 소모를 방지하고 절약함으로써 주부들이 자기 발전 및 자녀 교육에 힘쓰는 것이 가정의 발전이라고 강조되었다.346)김인자, 「능률면에서 본 부엌 개조」, 『새농민』, 4(5), 1964, 42쪽. 식모 없이 살 수 있도록 부엌을 치장하면 문화생활이 가능하다고 인식되었다.

육체노동에서 정신노동에 이르기까지 가사 노동을 직접 담당하는 ‘노동자’로서의 주부가 아니라 집의 안살림을 관리하는 사람, 식모와 달리 싱크대가 설치된 실험실 같은 부엌에서 연구하는 사람, 능률적이고 효율적인 운영의 성과를 자기 발전과 자녀 교육에 쏟은 사람으로 당시 ‘주부’는 이상화되었다. 이러한 이상화는 그 이전 시기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인습을 타파하고 근대적이고 서구적인 취향을 드러내기 위해 강조된 ‘부엌과 가정부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있다. 주부를 중심으로 가정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바깥일은 남편(남성), 집안일은 아내(여성)의 구도가 명확해지면서, 집안에서의 여성 중심성과 여성의 역할이 확실히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여성은 공적인 영역에서 배제된 만큼 집안에서는 확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보상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집안에서의 권력 확립이 바깥일의 주체인 남성에 의해서 좌우되며, 현모양처라는 기본 틀을 벗어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한계가 분명하였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입식 부엌이 일반화되고 주방 가구 전문 업체가 등장하면서, 부엌 자체가 주부의 개성과 취향을 드러내는 공간이 되었다. 부엌은 정서적이고 상징적인 공간으로 변화하였다. 부엌은 이제 식탁으로 연결되어 일상적으로 대화하면서 음식을 공유하고 일상생활을 논의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1980년대 들면서 남편의 가사 노동 분담이 현대 가정의 이상적인 이미지로 그려졌다는 점은 의미심장하 다. 신문과 텔레비전의 광고는 아내를 위해 설거지하고 빨래하는 남편의 모습을 담아 내었고, 이상적인 현대적인 남편은 서구의 남편처럼 부엌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담론이 형성되었다.347)함한희, 「부엌의 현대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화적 선택들」, 『정신 문화 연구』 86,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2002, 79쪽. 온 가족이 함께하는 부엌일, 가사 노동의 이미지가 주부의 욕망을 채워 주어 상품 광고에 효과적이었다. 1980년대 이후 이러한 이미지의 부각은 이미 ‘주부의 탄생’으로 강화된 가정 중심성에 기반하고 있었다.

현대 이미지들은 이상적 부엌을 소유한 주부는 노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이미지화된다. 그러나 여전히 부엌은 주부의 일터일 뿐이지 가족의 휴식 공간이나 담소의 장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음식 만드는 노동이 줄어들었다 하더라도 가족 구성원의 욕구의 증가와 위생 담론의 강화는 주부가 새로운 차원에서 노동하게 만들었다. 항상 다른 가족이 쉬고 편하게 느껴야 하므로 노동은 더욱 많아진다. 음식을 만드는 노동 대신에 아름다운 공간,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현대의 주부는 노동해야 한다. 부엌을 중심으로 한 주부의 소외된 노동은 식모에서 주부로 부엌 노동의 담당자가 변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노동의 성격이 변화하지 않았다는 데 이유가 있다고 하겠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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