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3권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
  • 제4장 반비간에서 주방으로
  • 5. 전통에 대한 향수 그리고 여성
김춘수

아리에스는 『아동의 탄생』에서 근대화 과정에서 “승리한 것은 개인이 아니라 가족”이라고 선언하였다.348)필립 아리에스, 문지영 옮김, 『아동의 탄생』, 새 물결, 2003. 가정성, 부부애, 모성애, 아동 중심성을 특징으로 하는 근대 가족 속에서 남편은 노동 시장에서 가족 임금을 받는 가족의 대표자가 되었고, 여성은 시장에서 제외되어 가족 안에서 가사 노동에 전념하는 어머니·아내·주부가 되었다. 한국에서 ‘신가정’, ‘스위트 홈’ 등의 이름으로 가족 담론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는 1920년대이다. 이는 여성이 추상적인 인격으로서의 국민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사와 육아를 통해 국가에 공헌하는 구체적인 국민으로 파악되었음을 의미한다.

1970년대까지 부엌 개량(서구화·입식화)은 근대적이고 문화적인 생활의 표본으로 제기되었다. 부엌 개량의 담당자로서 주부는 가정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식모를 없애고 주부가 스스로 가정 살림을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는 부엌 개량이 급선무였으며, 식모 없이 서구화된 부엌에서 주부가 직접 살림하는 것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이는 국가가 가정을 매개로 사회 구성원을 국민화하는 과정에서 여성을 가정의 주부로, 남성을 가족 부양자로 호명한 결과이다. 여성이 국민의 이름으로 호명될 때, 여성이 점하는 공간은 가정이었으며 부엌이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이미 입식화되고 서구화된 주택의 개량을 넘어서 주부의 서비스 개선과 감정 노동을 요구하였다. 주부는 이제 근대화의 기수에서 보람과 사랑의 화신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였다. 최근 들어 전통을 되살리려는 분위기가 압도하고 있다. 재래식 부엌, 부뚜막 조왕신, 나무로 밥을 하던 향수 어린 ‘어머니’ 이야기에서 과거의 여성은 희생과 사랑으로 가족을 보살피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반면 현대의 주부는 가족의 식사에 소홀해지고 있다고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런데 아파트 바람이 불고, 가전제품이 보급되고, 인스턴트식품이 범람하면서 주부들은 이 고귀한 역할을 포기해 가는 경향이 있다. 화롯불에 된장찌개를 얹어 놓고 남편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던 여심, 밥이 식을까봐 아랫목 이불 밑에 밥주발을 묻어 두던 풍습이 사라진 지 오래다. …… 가전제품이 주부들을 가사 노동에서 해방시킨 것은 다행한 일이지만, 숭늉 맛의 구수함을 영영 잃고만 건 사실이다. …… “아무래도 집에서 해먹는 것만 못하다.”고 가족들이 음식 타박이라도 하는 날엔 “요즘 세상이 다 그런데, 나만 맨 날 부엌데기가 되란 말이냐.”는 벼락이 내린다는 집도 있다.349)『조선일보』 1985년 5월 30일자.

구여성과 결별하였던 신여성이 주부가 된 현재, 주부는 다시 구여성인 어머니와 같지 않다고 지적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주부 이미지는 과거 부엌에 대한 향수를 매개로 드러나고 있다.

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농촌 가정에서는 새벽에 일어나 물을 긷고 방아를 찧어 아침을 짓고 나면 설거지로 하루를 열었다. 점심, 새참 준비에 한나절이 지났고 이어 저녁 준비, 설거지로 온통 하루를 부엌에서 보내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부엌의 의미는 그곳이 가족들에 대한 주부의 정성을 비는 장소라는 점에서 강조된다. …… 이렇게 부엌은 집안의 화목과 자손의 번영을 비는 마음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장독의 터주, 대청에 쌀독과 함께 모시는 성주, 조상 단지도 부엌에서 출발한 가신 신앙의 연장인 셈이다. …… 안뜰과 뒤안(뒤꼍)을 벗어나지 않는 좁은 공간에 불과하였지만 부엌은 그 집안 화목과 살림의 중심지였다는 점에서 오늘날 부엌의 위치와 의미를 또다시 생각하게 해준다.350)『조선일보』 1985년 3월 14일자.

주거 개선이나 부엌 개량이 서구화를 의미하면서 우리나라의 부엌과 주거의 긍정적인 부분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부각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아요. 생활이 묻어나는 장바구니에서, 윤이 나는 식탁의 그릇에도 행복이 깃들어 있어요.”라는 말속에 여성의 노동은 은폐되고, 소외된 채 추상화된다. 이로부터 새로운 형태의 현대판 ‘현모양처’가 탄생하는 것이다. 근대 가족의 표상인 ‘스위트 홈’은 이렇듯 소외된 여성의 노동으로 탄생되었으며 유지되고 있다. 부엌은 이러한 소외된 여성 노동의 장소이자, 여성의 소외된 노동을 유지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재구성되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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