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3권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
  • 제5장 붓그러하면 큰 병이 생깁니다
  • 2. 근대적 신체와 월경
  • 의학·위생·여성
김미현

서구 근대 의학은 인간 신체에 대한 기계론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근대적 신체는 인간 내부의 자연으로서 계산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 과학적 대상으로 전환되었다. 또한 근대 의학은 임상학적 사고방식에 따라 질병을 생물학적 실체로 인식하였고, 세균 이론의 확산에 따라 질병의 원인을 신체 외부의 객관적 실체에서 찾게 되었다. 이러한 근대적 질병론 및 신체관은 조선에 서구 의료가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한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서구 의료가 들어오면서 민간 처방은 비과학적인 것으로, 한의학도 비합리적·비체계적인 것으로 비판받게 되었다.351)조형근, 「식민지 체제와 의료적 규율화」, 『근대 주체와 식민지 규율 권력』, 문화 과학사, 1997, 179∼181쪽. 근대 의학은 의사의 진료만이 아니라 ‘위생’의 차원에서도 폭넓게 영향을 미쳤다. ‘위생’은 근대적인 생활의 실천 양식으로 등장하였다. 이른바 ‘위생’은 발달한 문명과 동일시되었다. 위생에 대한 무지는 문명인의 수치이자, 인격적 결함으로까지 치부되었다.

일본에서는 문명화 정책의 관점에서 의학과 위생학을 번역·소개하면서 부정(不淨) 관념을 위생 관념으로 재편하기 시작하였다. 1910년대는 근 대 국가 건설의 일환으로 위생 행정이 확충되고, 상세한 측정과 통계의 기술에 기초하여 신체에 대한 상세한 의학적·위생학적 감시를 시도하였다.

근대 의학은 우리 사회의 제반 영역에 침투하였는데, 가족에 대해서는 유아, 아동, 임산부의 건강이 주된 관심 영역으로 등장하였다. 지역 여성 공동체의 의례였던 출산은 병원 의사가 담당하는 ‘의학적 사건’으로 바뀌었다. 이는 한편으로 건강한 민족 구성원의 재생산이라는 한국인의 민족주의적 열망에서, 다른 한편으로 식민지 자원의 총동원이라는 일제의 제국주의적 요구에 의해서 추동되었다.352)김혜경, 「일제하 자녀 양육과 어린이기의 형성」, 『근대 주체와 식민지 규율 권력』, 문화 과학사, 1997, 191∼192쪽.

한편 신체에 대한 근대적 인식 속에서 남녀 간 성차의 근거를 생물학에 두려는 시도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남성과 여성의 기본적인 성적 차이, 곧 여성과 남성의 본질적인 차이는 발견 가능한 생물학적 차이에 근거한다고 단언하였다.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역할 자체는 그들 몸이 이미 정한 바이며, 자연에 근거한다고 보았다. 특히 남성에게는 없는 월경은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19세기 서구 학자들은 월경이 몸을 쇠약하게 만들며 이런 속성이 여성의 삶과 활동에 불리한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하였다.353)에밀리 마틴, 「여성 몸에 관한 의학적 비유 : 월경과 폐경」, 『여성의 몸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한울, 29∼33쪽. 이전 시기에도 월경혈을 ‘더럽고 깨끗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 공식 행사나 제의 참가 등을 금기시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 피를 몸 밖으로 내보내는 과정을 병리학적으로 취급하지는 않았다. 근대에 들어와 월경 중인 여성을마치 병적인 상태에 있는 듯이 다루기 시작하였고, 비정상적이라고 판정되어 교정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1910년을 전후로 잡지, 학교 교육 등을 통해 월경에 대한 병리학적 이해 방식이 유통되고 있었다.354)월경의 병리학적 이해 방식에 대한 일본의 연구 성과로는 다음의 책을 참고할 수 있다. 川村邦光, 『オトメの身體』, 紀伊國屋書房, 1994 ; 成田龍一, 「衛生環境の變化の中の女性と女性觀」, 『日本女性生活史』 4, 1990 ; 田口亞紗, 『生理休暇の誕生』, 靑弓社, 2003. 이러한 이해 방식은 의학과 위생의 차원에서 식민지 조선에도 유입되었다. 조선의 신문, 잡지에는 일본에서 유통되던 것과 거의 유사한 내용이 소개되고 있었다. 1920∼1930년대에는 의학 박사나 산부인과 의사가 점차 전문가 집단으로 자리를 잡아가면서 여성의 성, 월경, 임신 등을 전문적인 의료의 대상으로 다루었다.355)이명선, 「식민지 근대의 ‘성과학’ 담론과 여성의 성」, 『여성 건강』 2─2, 대한 여성 건강 학회, 2001. 107∼111쪽.

이러한 의학적 지식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파되었다. 신문, 잡지에는 여성에 대한 위생론이 점차 늘어났다. 거기에는 체육, 보건 등의 신체 관리 차원의 논의도 있으며, 통속 의학 차원에서 각종 질병에 대한 증상과 대비책을 논하는 내용도 있었다. 신문, 잡지의 ‘가정란’이나 ‘의학 상식란’에는 새로 발견된 의학적 사실, 생활에서 실천해야 하는 상식들, 독자 질의에 조언하는 고민 상담, 기획 기사의 연재 등이 넘쳐났다. 여성 잡지에 실린 위생에 관한 글 중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이 부인 위생과 소아 위생이었다. 건강에 관한 간단한 상식을 전달하는 잡보 형식의 글도 많았다. 『여성(女性)』의 「여성 학교」와 「위생 수첩」, 『여자계(女子界)』의 「가정 고문」 등이 그것이다.356)이화형, 『한국 근대 여성의 일상 문화 : 근대 여성의 삶을 만나러 가는 길』, 국학 자료원, 2004, 12∼13쪽.

산부인과 의사들은 계몽자로 등장하였고, 일본 신문이나 잡지의 내용, 서구의 연구서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의학적 설명을 동원하면서 무지에서 벗어나 여성의 몸을 과학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성의 몸에 대한 지식은 가정 위생 관리 차원에서 현모양처가 가져야 할 과학적 모성으로 설명한다든지 가부장적 가족 질서가 요구하는 자식 출산에 대해 새롭게 설명하는 등 다양한 요구에 호응하였다. 물론 당시 신문, 잡지의 구독층을 생각할 때, 이러한 의학 지식은 계층적으로 제한된 것이었다.

여자 의학 강습소나 여자 기독 청년회 등의 단체에서도 강연회 형태로 ‘부인 위생’을 전파하였다.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질병에 대한 주의, 결혼 전후의 위생, 아동 질병과 그 관리에 대하여 강연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여성의 신체가 관리되어야 하는 이유를 여성이 ‘민족 보건의 토대이자 어머니’인 점에서 찾고 있었다.

이렇게 근대에 들어오면서 여성의 신체는 새로운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남녀 성차에 대한 과학적 이해라는 시선은 월경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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