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3권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
  • 제5장 붓그러하면 큰 병이 생깁니다
  • 4. 생리 휴가가 상징하는 것
  • 1953년 근로 기준법과 생리 휴가
김미현

6·25 전쟁 후 방직업, 제분업, 제당업, 고무 공업, 연초 공업 등을 중심으로 산업이 복구되었고, 이러한 산업의 주축을 이룬 것은 바로 여성 노동자였다. 이 시기 공장 노동자 가운데 여성의 비율은 1951년 25%, 1957년 28%로 일제 강점기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여성 노동자가 증가하였는데도 그들이 직면한 노동 환경과 저임금은 개선되지 않았다. 여성이 전체 노동자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방직업의 경우, 작업장은 먼지와 습기, 열기로 가득 차 있는데도 환기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숨쉬기조차 어려웠고 일반 위생 시설 또한 극도로 열악하였다. 그 결과 폐결핵이나 호흡기 질환, 눈병 등을 앓는 여성 노동자가 많았다.420)이임하, 『계집은 어떻게 여성이 되었나』, 서해문집, 2005, 128쪽.

또한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강요당하였으나, 실업자의 홍수 속에서 직장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고, 몇 달씩 임금이 체불되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 직장을 그만둘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가구주의 임금이 낮아 자녀나 부인의 노동 참여가 불가피하였 다.421)이옥지, 『한국 여성 노동자 운동사』 1, 한울, 2001, 68쪽. 열악한 노동 현실 속에서 부산 조선 방직 쟁의(1951∼1952), 대구 내외 방직 쟁의(1954), 대구 대한 방직 쟁의(1955)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여성 노동자는 임금 체불, 무단 해고에 대항하며 파업 투쟁을 벌였다. 이러한 노동자의 투쟁은 아무런 노동 관계법도 없었던 상황에 경종을 울렸다. 이를 계기로 1953년 4월 20일에는 노동조합법, 노동 쟁의 조정법, 노동 위원회법의 시행령이 공포되었고, 1953년 5월 10일에는 근로 기준법이 제정되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일제 강점기에는 월경의 병리화 담론이 여성 노동자의 보호 논의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1953년 5월 10일 근로 기준법이 제정될 때 생리 휴가가 법제화되었다. 생리 휴가가 어떤 논의 속에서 법제화 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1953년 근로 기준법안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열악한 여성 노동 현실에 대한 정책적 배려로 일본 노동 기준법의 생리 휴가 제도를 참조하였다. 1952년 국회 정기 회의 속기록을 살펴보면, 정부의 초안은 여성 노동자가 생리 휴가를 청구할 경우 월 3일의 유급 생리 휴가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사회 보건 분과 위원회는 월 1일의 유급 생리 휴가로 축소하는 수정안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국회의원 김지태는 “공연히 그날을 휴일로 하지 말고 그에 대한 적절한 위생 물자를 다시 말하면 탈지면이라든지 소독 까-제(거즈)라든지 이러한 것을 여자 지도원에 맡겨서 이것으로서 적절히 처리해서 그날의 휴일을 방지하고 생산에 이바지하자는 것”이 좋고, “특히 생리에 유해되는 해가 있는 작업에 대해서는 당연히 2일 이상 휴가를 주어야 될 것”이나, 유해 작업은 따로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국회의원 박순천은 생리 기간 중 격한 노동은 정상적인 임신에 폐해가 많고 무급으로 하면 실정상 사람들이 쉬지 않고 일할 것이니, 장차 어머니가 될 여성의 보건을 위해 월 1일의 유급 휴가로 하자고 제안하였다. 이러한 심의 과정을 거쳐 “사용자는 여자가 생리 휴가를 청구하는 경우에 월 1일의 유급 생리 휴가를 주 어야 한다.”라는 규정(제59조)이 마련되었다.422)김엘림, 「생리 휴가 제도의 쟁점 및 정비 방향」, 『노사 포럼』 18, 경제인 총연합회 노동 경제 연구원, 2002, 87쪽.

박순천은 월경에 대한 병리화 담론을 여성 노동에 연결시키고 있었다.

이 생리일이라는 데 있어서는 이 생리 기간에 격한 노동을 할 것 같으면 여러 가지의 폐해가 많이 옵니다. 학교의 여학생이나 또는 우리 적령기에 있는 여자들이 발육 전에 많은 격한 노동을 할 것 같으면 조루(早漏)라든지 또는 불임증 여러 가지의 피해가 많기 때문에 다른 일본이나 외국 같은 데 있어서는 혹 무급으로 사흘 또는 일본 같은 데서는 무급으로 이틀의 휴가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무급으로 한다고 할 것 같으면 도저히 쉬지 않고 그 생활 면에 있어서 취업하리라고 봅니다. 만일 취업을 할 것 같으면 국민 보건을 위해서 모체인 어머니의 건강을 도저히 유지할 수 없다는 데서 사흘을 원안에서 나왔습니다만은 우리 보건 위원회에서는 사흘보다도 역시 제일 괴로운 날 하로 또는 준비하지 못하고 나와서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여러 가지로 해서 하로를 쉬게 했습니다.423)『대한민국 국회 속기록』 제15회 52차, 1953년 4월 13일, 9쪽.

그리고 생리 휴가를 “아들의 어머니라는 것을 생각해 주시고 국민의 어머니라는 것을, 모체의 보건을 위해서” 허가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박순천만 국가와 국민의 차원에서 논의한 것은 아니었다. 산전 산후 휴가 심의 과정에서도 “생산이라고 하는 것은 다만 일개인(一個人)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를 위한 희생적인 것이기 때문에 60일간의 유급 휴가를 하도록 구상한 것”이라고 논의되고 있었다. 노동자의 권리도 국가를 위한다는 차원에서 명분을 확보하고 있었고, 생리 휴가도 국가를 위한 모성이라는 차원에서 설득력을 호소하고 있었다.

박순천은 야간 노동 금지, 노동 시간 규정 등의 심의 과정에서는 발언하지 않았고, 생리 휴가에 대해서만 발언하고 있는데, 하루만이라도 허락해 달라는 식이다. 자본가에게도 최소한의 1일이라고 호소하였다. “조방(朝紡) 공장만이라도 5천여 명의 직공이 평균 연령이 23살입니다. 이 평균 연령 23살을 사흘의 휴가를 준다고 할 것 같으면, 만 5천 날은 유급으로 쉬어야 되겠기 때문에 도저히 기업주로서는 그렇게 될 수가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생각해서 유급으로 하로만 쉬게 해주십사하는 것”이었다.424)『대한민국 국회 속기록』 제15회 52차, 1953년 4월 13일, 9쪽 근로 기준법 심의 과정에서 여성, 유년 노동자에 대한 보호법 논의를 보면, 일련의 보호 규정을 최대한 없애려는 것에 대해 최소한으로 유지하려는 움직임을 볼 수 있다. 수세적인 상황 속에서 생리 휴가가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근로 기준법에는 산전 산후 60일의 유급 보호 휴가, 산전 산후 여자의 해고 제한, 생리 휴가, 18세 미만자와 모든 여성이 도덕상·보건상 유해한 사업장 사용 금지, 야간 근무 금지, 시간 외 근무 제한, 갱내(坑內) 근로 금지 등이 포함되었다. 이 법이 일본의 법을 모델로 급속하게 진행된 측면이 있지만, 당시 방직 공장 등에 미혼 여성 노동자가 많이 종사하고 있는 상황에서 만약 규정대로 시행되었다면 그런대로 현실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근로 기준법은 실제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근로 기준법의 위법 행위를 감독하기 위해 마련한 근로 감독관 제도는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근로 기준법은 하나의 강행법이었으나 사실상 무단 방치되는 실정이었으며, 정부는 기업주의 범법 행위를 소극적으로 묵인하였다. 근로 기준법에서는 8시간 노동제를 규정하였지만, 불법으로 13세 이하의 소년 소녀를 고용해 하루 10시간 이상의 노동으로 혹사하는 일이 허다하였으며, 임금 체불도 심각하였다. 이런 여건에서 생리 휴가가 보장될 리 만무하였다.425)임송자, 『대한 노총 연구』, 성균관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03, 164∼165쪽.

이렇게 기본적인 노동 조건조차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1960년대도 임금 미지불(근로 기준법상의 제 수당의 미지불), 근로 시간 위반, 취업 규칙 미신고 등이 근로 기준법 위반 내용으로 등장하였다. 1960년대 들어서 급속히 생성된 노동 집약적 수출 산업, 특히 여성 노동자가 대거 고용되어 있는 섬유, 봉제, 전자 산업 등에서 노동자 수는 증가하였지만, 여전히 장시간의 노동과 저임금의 문제가 심각하였고, 노조 설립은 어려웠다. 노동자들은 1962년 노동 쟁의권 부활 투쟁에 나섰고, 1963∼1964년 사이에는 노동조합의 정치 활동을 금지하고 노동조합 설립 허가제를 채택한 노동 악법을 바꾸려 투쟁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한 상공 회의소와 전국 경제인 연합회 등의 사용자 단체들은 산전 산후 휴가의 축소 및 생리 휴가 폐지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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