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1장 고대의 무기와 무예
  • 1. 고대 무기의 기본
  • 도검의 형식, 기능, 상징성
김성태

[도검의 형식, 기능, 상징성]3)김성태, 「삼국시대 도검의 연구」, 『인하 사학』 8, 인하 역사 학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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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검과 칼집
단검과 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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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제 단검
목제 단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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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환두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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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의 재질은 기원전 1세기경을 기점으로 청동 무기에서 철제 무기로 바뀐다. 철제 무기는 주조로 제작되던 청동 무기에 비하여 단조로 만들어져 살상력이 강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칼·창·화살촉 등의 철제 무기가 동시 다발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았다. 먼저 칼과 창이 철제로 제작되었고 한번 쓰고 나면 회수하기 어려운 화살촉은 기원후에야 석제·골제 등에서 철제로 대체되었다.

삼국 초기의 칼은 길이가 30㎝ 정도인 단검(短劍)이었다. 기본적인 형태는 한국식 청동 단검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는데, 칼몸·칼손잡이·칼코등이·칼끝자루장식 등을 따로 만든 다음 짜서 맞춘 조립식이다. 용도는 기본적으로는 살상용이었을 것이지만 벽사적·주술적 기능이 더 강하였다고 판단된다. 이는 광주 신창동 저습지 유적에서 한국식 동검을 모방하여 만든 비실용적 목검이 출토된 점,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무덤의 부장품으로 널리 애용되었고 다호리 1호분에서 단검과 함께 출토된 부채가 무속적 무구일 가능성이 있는 점, 김해 양동리 55호분에서 출토된 단검의 칼끝자루장식에 방울이 내장되어 칼의 의기성(儀器性)과 함께 주술성을 반영하는 점 등등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무당이 잡귀를 물리치기 위하여 휘두르는 신칼이 무구인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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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두대도를 짚은 무사
환두대도를 짚은 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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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두대도를 짚은 무사
환두대도를 짚은 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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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의 칼은 양날칼인 검(劍)이 초기에 잠시 유행한 것을 제외하면 2세기부터 줄곧 외날칼인 도(刀)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런 도는 환두대도(環頭大刀)라 부르는 고리칼이 기본형이고 길이는 대략 70㎝ 전후이다. 형태상 칼손잡이 끝부분에 둥근 고리가 붙어 있는 점이 가장 특징적이다. 이런 둥근 고리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일본도(日本刀)처럼 두 손으로 사용하지 않고 한 손으로만 휘두르던 것으로 판단된다. 형태상의 또 다른 특징은 칼손잡이와 칼몸 사이의 경계에 칼코가 없는 점이다. 이처럼 칼코가 없는 점으로 미루어 보병용이기보다는 기병용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에서 고리칼의 등장이 기병 전투의 등장과 궤(軌)를 같이한다는 주장 역시 이런 추측을 뒷받침한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고리에 긴 끈을 매단 칼이 확인되는데, 장식 효과뿐만 아니라 접전 때에 손에서 칼이 떨어지는 일을 방지하거나 상대편의 피가 손으로 흘러드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벽화에는 누비갑옷을 입은 무사가 칼을 손으로 공손히 잡고 있는 그림이 있는데, 조선시대 벼슬아치들이 임금을 만날 때 손에 쥐던 물건인 홀(笏)과 같은 용도로 칼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4세기 후엽에 들어서면 거대한 고총(高塚)이 만들어지고 무덤에 껴묻는 부장품의 양이 급증하고 종류도 다양해지며 재질도 고급화된다. 이런 문화사적 흐름에 동반하여 무기에서도 권위를 상징하는 칼이 등장하는데, 이른바 장식대도(裝飾大刀)가 그것이다. 장식대도란 보통 금·은·금동으로 칼자루와 칼집을 꾸민 칼을 말하는데, 장식은 주로 칼자루 끝장식인 고리에 집중된다. 여기서 장식의 재질인 금·은·금동은 신분적인 차이를 반영하며, 장식 문양은 시대적 혹은 지역적 차이를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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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엽문 환두대도
삼엽문 환두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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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고리문 장식대도
세고리문 장식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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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봉문 환두대도
용봉문 환두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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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출토 환두대도
무령왕릉 출토 환두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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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 문양은 크게 삼엽문(三葉文), 세고리문, 용봉문(龍鳳文) 등으로 나눌 수 있다.4)부산 복천 박물관, 『고대 전사』(특별전 도록), 1999, 28∼35쪽. 삼엽문 장식대도는 고구려의 평양 병기창 출토품이 대표적이나 신라·백제·가야 지역에서 고르게 확인된다. 삼엽문의 형태는 마치 새가 날개를 펼치고 비상하는 모습이나 꽃 모양을 단순하게 도안화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신라의 세고리문 장식대도는 C자 세 개를 삼각형으로 배치한 형태이나 구름의 도안으로 볼 수 있다. 칼에 구름의 변화무쌍한 기운을 더한 의도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임금을 호위하던 별운검(別雲劍)이 운검(雲劒)을 찬 기록과 상통할 수 있다. 이 세고리문 장식대도는 신라의 표지적인 무덤 양식인 돌무지 덧널무덤(積石木槨墳)에서만 출토되는 강한 지역성을 보이며, 구조적으로도 큰 칼과 작은 칼 두세 자루를 붙여서 하나의 칼로 만든, 이른바 모자대도(母子大刀)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연개소문이 칼 다섯 자루 찼다는 기록과 연결될 수 있는 흥미로운 장식대도이다. 황남대총(皇南大塚) 남분(南墳) 출토품이 대표적이다. 용봉문 장식대도는 둥근 고리 안에 용이나 주작을 돋을새김으로 표현하였는데, 무령왕릉(武寧王陵) 출토품이 대표적이다. 일반적으로 용은 입술이 되바라진 모양이고 주작은 부리가 뾰족한 모양이다. 합천 옥전 M3호분 출토품은 용과 주작을 함께 조각하였다. 이런 용봉문 장식은 5세기 후엽에야 등장하는데 처음에는 주작문이 주로 장식되다가 6세기가 되면 용문이 주 문양이 된다. 백제·가야 지역을 중심으로 출토되나 백제와 신라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6세기 전엽이 되면 신라 지역에서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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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두대도를 찬 호위 무사
환두대도를 찬 호위 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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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두대도를 찬 호위 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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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장식대도들은 지금의 삼정도(三精刀)처럼 군사 지휘권의 상징으로 왕이 장수에게 하사하였을 수도 있지만, 군사 동맹의 징표로 국가 혹은 집단끼리 주고받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는 신라와 대가야의 관계가 우호적으로 바뀌면서 고령 지산동 고분에서 신라계의 세고리문 장식대도가 출토되는 점, 고구려가 한성을 공략하자 위기감을 느낀 신라와 백제가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시점에서 신라의 돌무지 덧널무덤에서 백제계의 용봉문 장식대도가 비로소 출현하는 점, 최고 권력을 상징하는 용봉문 장식대도가 백제의 중앙보다는 신라·가야의 접경 지역에서 출토되는 점 등으로 뒷받침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성격에 대하여 논란이 많은 칠지도(七枝刀) 역시 백제 왕실이 왜에게 군사 동맹의 징표로 준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삼국시대 칼의 크기는 소형·중형·대형이 있었으나 길이 70㎝ 정도의 중형 대도가 일반적이며, 고구려 지역에서는 소형도 출토된다. 이런 소형은 중무장 기마병이 비상시를 대비하여 패용(佩用)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중국 지린 성(吉林省) 통구 12호분 전투도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는데, 이 벽화에는 갑옷과 투구로 온몸을 무장한 갑주 무사(甲冑武士)가 적장으로 추정되는 갑주 무사를 소도(小刀)로 참살하려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 다. 따라서 소도는 전투 시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하여 몸에 지니고 다니거나 아니면 장수들이 지니고 있다가 적의 목을 베는 데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중형 대도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행렬의 호위 무사나 무덤 문을 지키는 문지기들이 차거나 들고 있다. 이를 통하여 중형 대도는 호위용으로 썼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칼은 병졸에게 지급되지 않았던 무기로, 장군과 하급 군관에게만 지급된 것으로 파악된다. 용도는 위급한 때를 대비한 휴대용, 지휘용, 호위용 등으로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현대 무기의 권총과 쓰임새가 비슷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도검(刀劍)에 관한 기사가 적지 않게 있다. 그 중에서도 고구려 대무신왕대에 왕자 호동(好童)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하여 칼에 엎어져 죽었다는 기록이 일단 주목된다.5)『삼국사기(三國史記)』 권14,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2, 대무신왕 15년. 이른바 복검 정신(伏劍精神)이라 일컫는 무사 정신이 이미 고구려 초기부터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후 672년(문무왕 12)에 당나라에 올린 표(表)에도 죄를 사죄하면서 복검(伏劍)의 뜻을 들먹이는 사실을 통해서도 복검 정신이 면면히 이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6)『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7, 문무왕 12년. 다음으로 유리왕이 기둥 밑에서 찾은 부러진 칼을 징표로 해서 주몽의 아들임을 인정받아 왕위를 계승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 역시 흥미롭다.7)『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1년. 문헌에 검(劍)으로 기록된 사실로 미루어 양날의 단검으로 추정되며 부러진 것을 서로 맞추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간돌칼일 가능성이 있다. 일단 칼을 반쪽을 쪼개서 훗날 재회의 징표로 사용한 사실이 주목된다.

한편 칼은 전공(戰功)에 대한 포상(褒賞)으로도 하사되었던 것 같다. 『삼국사기』에는 661년(문무왕 1)에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운 사람들 가운데 각간(角干)과 이찬(伊湌)으로 총관(摠管)을 맡았던 장수에게는 검(劍)을, 파진찬(波珍湌)·대아찬(大阿湌)으로 총관을 맡았던 장수에게는 극(戟)을 포상으로 준 기록이 전한다.8)『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6, 문무왕 원년.

이 기록을 통하여 전공에 따라 포상을 하되 신분에 따라 포상물이 달랐 고, 그중에서 최고 신분과 최고 지휘자에게는 검을 하사하였던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이 밖에도 김유신이 이웃 나라 적군이 쳐들어오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천관(天官)에게 신령(神靈)을 청하자 3일째 되는 밤에 허성(虛星)과 각성(角星)의 두 별의 끝이 내려와서 칼을 흔들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9)『삼국사기』 권41, 열전1, 김유신 상(金庾信上). 칼을 통해 신통한 힘을 얻게 되고, 그 힘으로 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믿음이 배어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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