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1장 고대의 무기와 무예
  • 1. 고대 무기의 기본
  • 동아시아 최고의 활과 기사술
김성태

[동아시아 최고의 활과 기사술]12)김성태, 「삼국시대 궁의 연구」, 『학예지』 7, 육군 사관학교 육군 박물관, 2000.

삼국의 활은 긴 활인 장궁(長弓)과 짧은 활인 단궁(短弓)으로 구별된다. 단궁은 말 위에서 쏘기에 적합한 기마용의 활로 길이가 1m를 넘지 않는다. 몸체는 나무로 만드는데, 활이 굽는 부분에 짐승의 뼈를 얇게 다듬어서 덧붙여 탄력성을 높였다. 그래서 합성궁(合成弓) 혹은 각궁(角弓)이라 부른다. 이런 각궁의 모양은 무용총(舞踊塚) 수렵도에 그려진 활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데, 뼈를 덧댄 부분에 끈을 돌린 마디가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 리고 실물 자료로는 평양 영화 9년명(永和九年銘, 353) 벽돌무덤에서 출토된 골제(骨制) 활의 부속구가 있어13)榧本龜次郞·野守健, 「永和九年在銘塼出土古墳調査報告」, 『昭和七年度古墳調査報告』, 1933. 당시 각궁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이런 각궁을 가지고 사냥을 하는 장면이 수십 곳에 그려져 있는데, 앞이 편편한 도끼날촉을 끼운 화살로도 호랑이의 두개골을 관통시킬 정도의 위력을 지닌 것으로 표현하였다. 특히 동명왕릉 부근 12호분에서 수습된 척추뼈에는 화살촉이 그대로 관통한 채로 남아 있어 고구려 활의 우수성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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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렵도의 각궁
수렵도의 각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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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궁 실물
각궁 실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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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우수한 활을 보유하였다. 이는 『대동야승(大東野乘)』에서 한·중·일 삼국의 무기를 평가하면서 중국의 창, 일본의 칼, 조선의 활이라 기록한 사실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14)『대동야승(大東野乘)』 권56, 송와잡설(松窩雜說). 이렇게 조선의 활이 우수한 이유로는, 우선 사계절이 뚜렷하여 탄력성 있는 활대를 만들 수 있는 재료가 산재하였던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기마전(騎馬戰)과 수성전(守城戰)을 위주로 하는 전쟁 방식이 널리 유행한 데에 있다. 이런 결과로 고구려의 활은 우수성이 널리 알려져 호궁(好弓), 각궁(角弓), 맥궁(貊弓) 등으로 불렸다. 백제 역시 고구려 활에 버금갈 정도의 활을 보유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는 근초고왕이 각궁의 화살을 일본 사신에게 선물한 기록으로 알 수 있다. 당나라가 탐내던 신라의 천균노(千鈞弩) 역시 우수한 활이 있었기에 제작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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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추를 관통한 화살촉
척추를 관통한 화살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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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의 전투 방식은 보병과 기병이 합동 전술을 펼치는 보기전(步騎戰)이 기본이었다. 물론 기본적인 전투는 보병이 전담하였으나, 승패를 판가름하는 것은 결국 기동성을 바탕으로 하는 기병의 몫이었다. 이런 까닭에 말을 타면서 전투를 치르는 기사(騎射)가 중시되었고, 그에 부응하여 기사용의 활 즉 단궁이 발달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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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기(漆器) 도깨비 얼굴 화살통
칠기(漆器) 도깨비 얼굴 화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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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삼국의 전투는 산성을 공취하고, 이를 방어하는 수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수성전에서는 단병접전(短兵接戰)보다는 원거리 공격을 최우선으로 한다. 그리고 원거리 공격에 적합한 병기는 장궁이었고, 이는 다시 궁술(弓術)과 활의 발달을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하게 하였다.

778년(원성왕 4) 유학을 중심으로 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통하여 관리를 등용하기 이전에는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사를 인재 등용의 가장 중요한 척도로 삼았다. 고구려의 경당(扃堂)에서도 기사를 가르쳤으며, 이후의 무과 시험에서도 궁술을 기본적인 시험 과목으로 채택하였다. 한편 『삼국사기』를 보면 군왕의 기 질로 기사를 부각하고 있는데,15)『삼국사기』와 『삼국지』에서는 아래의 주몽의 기사를 필두로 무려 13여 곳에서 군왕의 자질로 선사(善射)를 강조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평원왕, 연개소문, 비류왕, 설왕, 동성왕을 들 수 있다.(“位宮有力勇 便鞍馬 善獵射”『삼국지(三國志)』 권30, 동이전(東夷傳) 제30, 고구려.) 이 역시 삼국시대에 기사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중시하였던가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이는 바보 온달(溫達)이 3월 3일 고구려 평원왕이 연 사냥 행사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어, 가장 많은 사냥감을 잡아서 등용되게 되는 이야기에서도 잘 알 수 있다.16)『삼국사기』 권45, 열전5, 온달(溫達). 이렇게 기사를 중시한 까닭은 활쏘기와 말타기가 전투 능력과 바로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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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희
마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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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흥리 고분 벽화의 마사희(馬射戲) 장면은 기사를 통한 인재 등용을 잘 보여 준다. 이 벽화에는 말을 탄 네 명의 무인과 평복 차림의 인물 세 명이 등장하고, ‘마사희(馬射戲)’, ‘사희주기인(射戲主記人)’ 등의 글자가 적혀 있다. 이를 통하여 마사희 벽화는 말 탄 사람이 기사의 능력을 보이고, 이를 심판관 혹은 참관자가 기록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이 마사희는 단순한 활쏘기가 아니라 기사술을 평가 기준으로 삼아 무관(武官)을 선발하던 장면을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시대에 편찬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서 1715년(숙종 41) 임금이 대조전에 납시어 별군직 군사에게 작은 짚으로 만든 인형을 말에 타고 활을 쏘 아 맞추는 별시(別試)를 보였다는 기록은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17)『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권수(卷首) 병기총서(兵技總敍).

고구려는 활이 우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적(鳴鏑)과 도끼날촉이라는 화살촉이 있었다. 『사기(史記)』 「흉노전(匈奴傳)」에는 우는살인 명적의 사용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18)『사기(史記)』 권110, 열전50, 흉노전(匈奴傳). 태자 묵돌(冒頓)이 자기 아버지인 선우(單于) 두만(頭曼)을 시해할 때, 수렵을 호종하면서 명적을 두만에게 쏨으로써 사격 목표를 지시하여 사살하였다는 기록이다. 그리고 두만뿐 아니라 그의 애첩과 선마(善馬)를 죽이는 데에도 명적으로 사격 목표를 정하여 부하로 하여금 일제 사격토록 하였다. 이 기록 속의 명적이 고구려 유적에서 확인되는데, 이름하여 삼익촉(三翼鏃)이라 한다. 삼익촉은 세 개의 날개를 가진 촉머리 아래에 소리를 내는 골제(骨制)의 명적이 달린 우는살이다. 이 삼익촉의 사용례는 고구려 벽화 고분의 수렵도 대부분에 그려져 있다. 이 삼익촉에는 앞서 『사기』 흉노 기사에 언급된 명적이 부착된 점과 수렵도에서 주인공이 호랑이나 사슴을 사격하는 데에 사용되는 점 등으로 미루어 표적물(標的物)을 알리는 신호용·지휘용으로 사용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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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익형 화살촉
삼익형 화살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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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날형 화살촉
도끼날형 화살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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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날촉은 날 부분이 뾰족하지 않고 도끼날처럼 편평한 직선을 띠는 형식으로, 이 역시 덕흥리 벽화 고분의 수렵도 등 수렵 시에 주로 사용되는 철촉으로 묘사되어 수렵용으로 판단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덕흥리 고분 벽화의 마사희 그림를 보면 궁수가 쏘는 화살촉이 도끼날촉인데, 이 그림이 기사 시험일 가능성이 높은 사실을 감안할 때, 도끼날촉은 연습용 혹은 시험용 철촉으로 볼 수 있다. 삼익형과 도끼날촉은 신라의 돌무지 덧널무덤에서도 확인되어 두 나라 사이의 정치적·군사적 관계를 살필 수 있는 근거 자료가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고구려의 문물이 북방 기마 민족과 상통하였음도 시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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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돌화살촉
각종 돌화살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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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촉은 재질에 따라 돌화살촉, 동화살촉, 철화살촉으로 구별되는데, 전문 용어로는 석촉(石鏃), 동촉(銅鏃), 철촉(鐵鏃)으로 부른다. 청동기시대까지는 오로지 석촉을 썼으며, 역사시대에는 철촉을 주로 사용하였다. 그에 비해 동촉은 극히 적은 수만 발굴되는 점으로 미루어 일반적으로 쓰지 않은 듯하다. 중국의 화살촉이 주조로 만든 삼각추형의 동촉이 기본인 사실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석촉은 크게 평면 형태가 삼각형이면서 몸체가 편형하고 슴베가 없는 삼각형촉(三角形鏃)과 평면 형태가 버들잎 모양으로 길면서 몸체가 단면 마름모꼴로 두툼하며 슴베가 달린 유엽형촉(柳葉形鏃)으로 나눌 수 있다. 삼각형촉은 청동기 전기까지 사용하였으며 유엽형촉은 주로 청동기 후기에 썼다. 이들 석촉은 돌을 직접 갈아서 수작업으로 만들기 때문에 세부적인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세부 형식 중에는 슴베가 몸통에 비하여 매우 짧은, 비실용적인 것들도 적지 않다. 석촉의 사용은 읍루(挹婁)와 물길(勿吉)에 관한 문헌 기록에서 확인되는데, 청석(靑石)으로 만들었고 수렵이나 인마 살상 시에는 독약을 발라서 사용하였던 것으로 전한다. 이런 독화살의 사용은 부시먼 족(Bushman族)의 사냥 방법에도 애용되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선사시대에 일반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역사시대가 되면 화살촉은 대부분 철촉으로 바뀌게 된다. 철을 두드려서 형체를 만드는 단조(鍛造)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촉머리가 매우 강인하다. 일반적으로 수차례 반복 사용하는 연습용 화살촉은 강철로 만든 데에 비하여 소모적인 전투용 화살촉은 상대적으로 강도가 떨어지는 철을 사용 하였다. 철촉의 일반적인 형태는 독사 머리 모양의 촉머리에 긴 목이 있는 슴베가 붙어 있다. 후대로 갈수록 목이 점차 길어지면서 전체 길이가 길어진다. 이런 화살촉의 길이 증가는 활의 사정거리 증가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그만큼 활의 탄력이 강해지고, 화살의 길이가 길어지면서 사정거리가 멀어졌음을 알 수 있다. 보통 화살촉의 길이는 4세기까지는 대략 5㎝ 정도, 5세기에는 10㎝ 정도, 6∼7세기에는 15㎝ 정도이다. 형태는 5세기까지는 도자형·독사머리형·마름모형·도끼날형·끌형·삼익형·역자형·동검형 등 매우 다양한 편이었으나, 6세기 중엽 이후가 되면 초장경하각형(超長頸下角形)이라고 불리는 목이 매우 길고 촉머리가 보트 모양으로 생긴 철촉으로 통일된다. 즉 철촉의 생산에서 표준화와 규격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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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검형 화살촉
동검형 화살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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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장경하각형 화살촉
초장경하각형 화살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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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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