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1장 고대의 무기와 무예
  • 1. 고대 무기의 기본
  • 특수 목적용 보조 병기
김성태

[특수 목적용 보조 병기]19)김성태, 「최근 보고된 고구려 무기의 검토」, 『고구려 연구』 20, 고구려 연구회, 2005.

삼국시대 기본 병기는 활과 창이며 칼은 장군이나 하위 군관만이 지닐 수 있었다. 이들 기본 병기는 장사(將士)나 병졸(兵卒)이 기본적으로 소지하는 무기라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부대 단위로 지참하거나 특수 목적에 사용하는 병기가 있는데. 이를 보조 병기라 한다. 이런 보조 병기에는 전투용 도끼인 횡공부(橫孔斧), 가지창인 극(戟), 긴 자루를 끼운 월도(月刀)의 용도로 쓴 곡도(曲刀), 추(錘)에 쇠사슬을 달아 만든 철연추(鐵鏈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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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용 도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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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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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겁식 도끼와 구별되는 횡공부는 요즘 도끼의 형태를 갖춘 것으로, 몸통에 날 방향과 평행하는 자루 구멍을 뚫어 그곳에 자루를 끼운 도끼를 말한다. 고구려 유적을 비롯하여 산성(山城) 유적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된다. 출토 유적의 축조 시기로 미루어 삼국시대 중기에 출현하여 삼국 후기에 널리 사용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 횡공부가 농공구류로도 사용되었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지만, 영남 지방의 고분에서 확인되는 농공구류의 철부(鐵斧)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전부(戰斧)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이는 농공구용의 날과는 달리 평행하는 횡공부(橫孔部)를 갖추고 있는 점, 산성 유적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점, 아차산 제4 보루 출토품과 같은 양날을 갖춘 전투용 도끼가 확인되는 점 등으로 뒷받침된다. 특히 오녀산성(五女山城) 철기 저장고에서20)遼寧城文物考古硏究所, 『五女山城』, 文物出版社, 2004. 철제 자루가 달린 것이 출토되어 이런 주장을 입증하고 있다. 문헌상으로는 백제 무왕이 신라를 공격할 때, 신라 장군 눌최(訥催)가 백제 병사가 휘두른 도끼에 맞아 죽었다는 기사는 전부(戰斧)의 존재를 분명하게 전해 준다.21)『삼국사기』 권47, 열전7, 눌최(訥催). 이와 관련하여 백제 무왕이 당나라에 명광개(明光鎧)와 함께 장식 도끼인 조부(雕斧)를 헌상한 기록은 참고할 만하다.22)『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5, 무왕 27년 ; 『신당서(新唐書)』 권220, 열전145,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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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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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횡공부가 표현된 사례로는 안악 3호분 행렬도의 부월수(斧鉞手), 약수리 고분 벽화 행렬도의 부월수, 평양 역전 2실묘 전실 서벽의 인물상, 안악 3호분 전실 남벽의 부월수 등의 고구려 고분 벽화를 들 수 있다. 이들 벽화를 통하여 횡공부에는 어깨에 짊어지고 다닐 수 있는 길이 1m 정도의 단병식(短柄式), 창대와 같이 긴 길이 1.5m 정도의 장병식(長柄式)의 두 종류가 있는 점을 알 수 있다. 덧붙여 부월수는 호위 무사가 주로 지니고 있고 중무장을 하지 않은 평복차림인 점도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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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도 복원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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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도 실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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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에 관해서는 『주서(周書)』 「고구려전」에 고구려의 병기로 극이 있다고 분명히 적고 있다.23)『주서(周書)』 권49, 열전41, 고려. 또한 『삼국사기』 무관조에는 개지극당(皆知戟幢)을 690년(신문왕 10)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24)『삼국사기』 권40, 잡지9, 직관 하 무관. 이에 앞서 661년(문무왕 1)에 전공을 세운 총관들에게 검과 극을 하사하였다는 기록도 있다.25)『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6, 문무왕 원년. 그리고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는 극을 들고 싸우는 신라 군사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26)『삼국사기』 권41, 열전1, 김유신 상. 그런데 현재까지 실물로 발견된 삼국시대의 극은 한 점도 없으며, 단지 광양 마로산성27)국립 광주 박물관, 『선사와 고대의 여행』(특별전 도록), 2005, 114쪽. 등 통일신라시대의 유적과 일본 쇼소인(正倉院) 소장품에서 확인될 뿐이다. 고분 벽화에서는 안악 3호분 행렬도의 전배 좌우 양측 가장자리의 무사들이 들고 있으며, 동명왕릉 부근 1호 벽화 고분에 그려진 사천왕이 이지창(二枝槍)을 들고 있으나 창에 ㄴ자 모양으로 위로 꺾인 원(援)이 붙어 있는 형태로 전형적인 극의 형태와는 차이가 난다. 결국 극은 신라가 중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7세기 중엽부터 제 한적으로 사용하였고, 삼국을 통일한 후 개지극당의 창설과 함께 극을 주요 병기로 삼았던 것으로 추측된다.28)김성태, 「고구려의 무기(2)」, 『문화재』 27, 문화재 연구소,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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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연추
철연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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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도는 현재까지 고구려 지역에서는 마선묘구 2100호에서 출토된 것이 유일하며, 남부 지방에서는 김해 대성동 23호 출토품과 동래 복천동 38호분 출토품이 있을 뿐이다. 몸체의 하단부에 두 개의 큰 구멍이 있어 자루에 결합시켰던 것으로 생각된다.29)부산 복천 박물관, 앞의 책, 36쪽. 초승달 모양의 큰 칼인 언월도(偃月刀)의 조형(祖形)으로 파악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긴 자루를 부착하여 말 위에서 두 손으로 사용하는 장병기(長柄器)이다. 『무예도보통지』에는 중무장한 말의 다리를 가격하는 데 적절한 무기라고 기록되어 있다.

철연추는 국내성(國內城)에서 출토된 것이 유일하다. 형태는 네 마디의 철봉(鐵棒)과 끝마디에 다각형의 추(錘)가 달린 특이한 모양과 구조의 철제품이다. 전체 길이가 69.2㎝이고 철추(鐵錘)의 길이는 9.4.㎝이다. 이 유물의 용도에 대해서는 확언하기 어렵지만, 『무경총요(武經總要)』에 보이는 두 개의 쇠막대기를 쇠사슬로 목봉(木棒)에 연결한 연주쌍철편(連珠雙鐵鞭)과 비슷한 것으로 추측되며, 여러 가지 마디로 이루어진 다절편(多節鞭)의 조형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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