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1장 고대의 무기와 무예
  • 2. 기마 전투의 성행과 마구·갑옷의 발달
  • 삼국 후기에 유행한 양당개와 명광개
김성태

삼국시대 갑옷에 관한 자료는 고분 벽화에 갑주 무사도가 그려져 있고, 대형 고분에 철갑옷의 매장이 유행하던 5세기 무렵에 집중되어 있다. 이에 비해 삼국 후기인 6∼7세기에는 고분에 무기를 부장하는 풍습이 사라 지고 고분에 생활 풍속도를 그리지 않았기 때문에 갑옷과 관련된 자료를 거의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삼국 후기의 갑주에 관한 구체적인 실상을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출토 유물과 단편적인 기록을 통하여 당시 갑주의 개략적인 실상은 파악할 수 있다. 우선 철갑옷과 관련된 자료는 아차산 시루봉 보루에서 수습한 찰편 123점이 유일하다. 이 아차산 제4보루 출토 찰편의 세부 특징은 길이 10㎝ 전후로 찰편으로는 비교적 크고, 요찰(腰札)로 추정되는 철편이 일부 확인되며, 형태가 길쭉한 장방형으로 정형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런 기본적인 특징으로 미루어 갑옷의 종류 중에서 양당개(裲襠鎧)일 가능성이 높다.36)김성태, 「남한 지역 출토 고구려 무기의 고찰」, 『경기도의 고구려 문화유산』(학술 세미나 발표문), 경기도 박물관, 2006. 이 양당개는 남북조시대에 유행한 갑옷으로 소매와 견갑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삼국 후기 찰갑의 모습은 중국 북위(北魏) 시대의 갑주 무사 도용(甲冑武士陶俑)을 참고하여37)成東·鍾少異, 『中國古代兵器圖集』, 解放軍出版社, 1990, 173쪽. 추측해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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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당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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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7세기가 되면 공·수성용 무기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의 병기 체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갑옷 역시 중국의 것을 채용하였던 것으로 판단되며, 이때 유행한 것이 명광개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추측은 645년(보장왕 4)에 당나라 군대가 고연수(高延壽)와 고혜진(高惠眞)이 이끄는 고구려군을 패배시키고 명광개 1만 령(領)을 고구려로부터 획득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하여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38)『삼국사기』 권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4년. 이 명광개는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에서도 일반적으로 사용하였고, 성능 또한 우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626년(무왕 27)에 백제가 고구려에 명광개를 헌상하려고 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39)『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5, 무왕 27년. 621년에 백제 무왕이 당나라에 명광개를 헌상하였다는 중국 측의 기록으로 뒷받침할 수 있다.40)『신당서』 권220, 열전145, 백제.

이들 양당개·명광개와 짝을 이루었던 실물 투구로는 아차산 제4 보루에 출토된 것이 원상 복원이 가능한 유일한 예이다.41)서울 대학교 박물관, 『아차산 제4 보루』, 2000. 이 철주는 정수리 부 분을 보호하기 위한 챙이 있는 반구상(半球狀)의 복발(覆鉢)과 52개의 소찰로 구성되어 있다. 이 철주는 일본 고분 시대 후기에 유행하는 충각부주(衝角付冑, 모자챙과 같은 충각이 달린 투구)와 연결되는 투구로 판단된다. 이들 양당개와 명광개의 복원 모습은 우리나라의 출토지 미상의 전사가 그려진 도침(陶枕, 시신의 머리를 고정하기 위한 도자기로 만든 베개)에서 엿볼 수 있으나 사실감이 떨어지므로, 중국 도용에 표현된 명광개를42)成東·鍾少異, 앞의 책, 188쪽. 착용한 무사를 통하여 구체적인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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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광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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