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2장 오백 년 사직을 지킨 고려의 무기와 무예
  • 1. 종래 무기와 무예의 계승 및 발전
  • 여진 정벌과 기병의 강화
김대중

별무반(別武班)이 조직된 것은 숙종 때였다. 여진 정벌에 대비할 목적으로 상비군인 6위 이외의 특수 군단이 새로이 창설된 것이다. 별무반은 신기군(神騎軍)·신보군(神步軍)·항마군(降魔軍) 등으로 편성되었다. 고려가 여진을 정벌해야 하였던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물론 고려 태조의 북진 정책 추진에 따라 거란과의 대결이 불가피하였지만, 여진 문제는 앞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그러던 가운데 여진이 두만강 유역으로부터 고려 장성의 동북쪽에 이르는 갈라전(曷懶甸) 지역으로 세력을 뻗쳐오면서 문제가 생겼다. 이 지역은 고려가 여진을 방어하기 위한 변경의 요충지였다. 강성해진 완안부(完顔部)가 갈라전 지역의 여진인들 가운데 고려에 복속하고 있던 7개 촌락을 공격하였고 달아난 무리들을 추격하여 정평(定平, 평북 정주)의 장성 부근까지 이르게 되었다. 여진의 이러한 군사적 위협에 대해 고려는 위기감을 느꼈다. 1104년(숙종 9)에 판동북면행영병마사(判東北面行營兵馬使) 임간(林幹)이 여진을 공격하였으나 크게 패배하였다. 다시 추밀원사(樞密院使) 윤관(尹瓘)이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으로 여진 정벌에 나섰으나 패퇴하고 말았다.

1차 여진 정벌에 실패한 고려는 별무반을 설치하였다. 별무반에 대해서는 윤관의 목소리가 담겨 있는 기록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신이 적의 기세를 보아 강성함을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마땅히 군사를 휴양시켜 훗날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또 신이 패배한 것은 적은 기병인데 우리는 보병이라 대적할 수 없는 데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건의하여 별무반을 세우고, “문무의 산관(散官)과 이서(吏胥)로부터 상고(商賈)·복예(僕隷) 및 주(州)·부(府)·군(郡)·현민(縣民)에 이르기까지, 무릇 말을 가진 자는 다 신기(神騎)를 삼고, 말이 없는 자는 신보(神步)·도탕(跳蕩)·경궁(梗弓)·정노(精弩)·발화(發火) 등의 군으로 삼되, 20세 이상인 남자로서 과거에 응시하는 자가 아니면 모두 신보에 속하게 하고, 서반(西班)과 모든 진부(鎭府)의 군인은 사시사철 훈련하였다. 또 승도(僧徒)를 뽑아서 항마군을 삼았다. 드디어 군사를 훈련하고 곡식을 저축하여 다시 치기를 꾀하였다.”84)『고려사』 권96, 열전(列傳)9, 윤관(尹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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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척경입비지도(高麗拓境立碑之圖)
고려척경입비지도(高麗拓境立碑之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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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군이 패배한 원인은 적이 기병 중심인 데 반해 보병 위주의 군대라는 점에 있었다. 따라서 윤관이 고백한 패인과 관련하여 별무반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바로 신기군이다. 약 17만 명인 별무반에서 신기군 병력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다. 기록에 “말을 가진 자를 신기군으로 삼는다.”고 하였으니 신보군보다는 훨씬 적었을 것이다. 일반 백성들의 다수가 말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85)김당택은 별무반이 군반씨족(軍班氏族)의 와해로 인한 국방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설치되었다고 보았다(「별무반의 설치와 군제의 변화」, 『고려 군제사』, 육군 본부, 1983, 241∼249쪽). 김낙진도 별무반의 설치를 군반씨족제에서 병농일치제에 입각한 군사 조직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하나의 단계를 보여 준 것이라고 하였다(「고려의 여진 정벌과 별무반」, 『고려시대의 대외 항쟁』, 전쟁 기념관, 2004, 23∼24쪽).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였을 때 마군이 2만이었음은 참고할 만하다. 마군이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나 기병 중심의 무예가 또다시 필요해진 것이다.

그러나 기록대로 말을 소유하였다고 해서 바로 기병에 편성하여 전쟁에 나설 수는 없다. 기병은 상당한 훈련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평상시에 훈련이 되지 않은 말의 소유자는 신기군으로서 역할을 다할 수 없다. 기병이 되려면 기본적으로 말 타는 것은 물론이고 마상에서 병기를 사용할 수 있는 무예를 연마해야 한다. 따라서 사료에는 말의 소유 유무만으로 병종(兵種)을 분류하였지만, 적어도 여진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려면 전투 기병으로 양성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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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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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도강도(騎馬渡江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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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전쟁을 앞두고 제한된 기간 내에 고도의 기병 중심의 무예를 수 련해야 하였다. 이 점은 예종이 1110년(예종 5) 9월에 남명문(南明門)에 거동하여 신기·신보·정노·도탕반의 군장(軍將) 등을 사열하고, 신기군에게 타구(打毬)하게 하였던 사실에서도86)『고려사』 권13, 세가13, 예종 5년 9월 기묘.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국왕이 관심을 갖고 사열을 하였다는 이야기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 별무반이 어떻게 운영되느냐에 따라 국방 현실이 달라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열을 받아야 하는 군사는 임무와 관련된 무예를 끊임없이 연마해야 한다. 결국 별무반의 설치는 고려의 무예가 2군 6위의 중심의 보병 무예에서 또다시 기병 무예로 전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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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촉·화살의 세부 명칭
화살촉·화살의 세부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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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의 세부 명칭
활의 세부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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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특수 부대 가운데 경궁군(梗弓軍)과 정노군(精弩軍)도 주목된다. 경궁군은 관통력이 강한 활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부대로 이해된다. 활은 화살을 쏠 수 있는 무기로 선사시대부터 화약 병기가 출현한 이후까지 사용한 무기이다. 장병기인 활은 이민족과의 전쟁이 잦았던 고려시대에도 주요 무기로 사용되었다. 궁시(弓矢)는 자체의 성능이 우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상당한 훈련이 필요하다. 국왕이 행차하여 대장군 이하 병사에 이르기까지 과녁을 쏘게 하였다든가 백관이 활쏘기를 연습하였다는 기록은 『고려사』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훈련은 수양의 한 방편이기도 하였다. 궁시는 화약 병기가 출현하기까지 도검, 창과 함께 주요 무기였다. 그러나 화약 병기가 크게 보급되었다고 해서 전투 병기로서 활의 가치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화약 무기의 결함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총통(銃筒)에 화약을 장전하는 사이에 궁시를 비롯한 전통 무기는 여전히 유효하였던 것이다. 또 숙위군(宿衛軍)이 약하였을 때에는 궁수(弓手)를 모집하여 유사시에 대비케 하였던 기록에서도87)『고려사』 권82, 지36, 병2, 공민왕 3년 7월. 고려시대에 궁시가 중요한 무기였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경궁은 일단 시위를 당기는 것부터가 일반 활보다 힘들며, 따라서 자유자재로 쓰려면 많은 훈련을 거쳐야 한다.

정노군은 쇠뇌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부대이다. 쇠뇌는 기계적 장치를 이용하여 화살을 쏘는 활의 일종이다. 한마디로 기계식 활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쇠뇌는 전통적인 활을 개선한 무기이다. 쇠뇌는 나무로 된 활 틀과 발사 장치인 뇌기(弩機)로 이루어져 있으며, 뇌기는 시위걸개와 방아쇠 멈추개, 그리고 방아쇠로 구성되어 있다.88)김대중, 「쇠뇌」, 『우리나라의 전통 무기』(특별전 도록), 전쟁 기념관, 2004, 112∼116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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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뇌 복원품
쇠뇌 복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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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기
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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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유물을 통하여 쇠뇌의 발사 장치인 뇌기는 이미 청동기시대부터 존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5세기 전반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덕흥리(德興里) 벽화 고분의 전실 남벽 행렬도의 문자 기록에서도 쇠뇌가 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행렬도의 앞부분에는 북과 뿔나팔을 울리는 고취악대가 나가며 그 뒤에는 쇠뇌를 지고 나가는 말 탄 사람이 있는데 그 곁에 “계현령이 쇠뇌를 들어 올렸다(薊縣令捉軒弩).”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558년(진흥왕 19)에 나마(奈麻, 신라 17관등 중 11관등) 신득(身得)이 쇠뇌를 만들어 성 위에 장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89)『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新羅本紀)4, 진흥왕 19년 2월. 또 669년(문무왕 9)에는 당 나라에서 쇠뇌 제작 기술자(弩師)였던 신라의 구진천(九珍川)을 데려 갔으나 구진천은 끝내 우수한 쇠뇌 제작의 기밀을 전수하지 않았다고 전한다.90)『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6, 문무왕 9년 겨울. 그뿐만 아니라 신라에는 쇠뇌를 전문적으로 운용하는 부대인 노당(弩幢)이 있었다. 따라서 고려의 쇠뇌는 삼국시대의 그것을 계승·발전시켰다고 이해된다.

쇠뇌를 이해하려면 관자(管子)의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는 “무기가 없는 자는 가만히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과 같으며, 활을 쏘아 적을 명중시킨다 할지라도 화살촉이 상대의 살 속 깊숙이 들어가지 못한다면, 이는 화살촉이 없는 것과 같다.”91)『관자(管子)』, 無器者, 與坐而待死者同實, 中而不能入者, 與無鏃者同實.라고 하였다. 무기 발달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그러나 무기의 발달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전통적인 활을 이를 제대로 다루려면 일정한 힘과 기술이 있어야 하고,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반면 쇠뇌는 조작이 간편하다. 쇠뇌의 일종인 수노기(手弩機)의 경우 힘이 약한 아녀자들도 다룰 수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명중률도 쇠뇌가 활에 비해 대단히 높다. 쇠뇌는 또 엄폐된 곳에서 운용할 수 있어 방어에도 유리하다. 그뿐만 아니라 엄폐된 곳의 구멍을 통해 언제라도 쏠 수 있어 공격에도 유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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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기의 구조와 세부 명칭
뇌기의 구조와 세부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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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뇌는 한마디로 지지대를 갖춘 기계식 활이라 할 수 있다. 전통적인 활에 받침목을 대어 안정도를 높인 것이다. 쇠뇌는 당겨진 시위를 걸쇠에 걸어 놓고 목표물을 조준한 다음 방아쇠를 당김으로써 화살을 추진시키는 무기이다. 전통적인 활에서 화살이 추진되어 목표물에 명중되는 과정을 한 단계 한 단계씩 구분하여 조작하게 만든 것이다. 분당 여섯 발을 쏠 수 있는 활에 비해 쇠뇌는 한 발밖에 쏘지 못하지만 활을 쏠 때 요구되는 강한 힘의 지속 상태가 쇠뇌에서는 기계적으로 작용하여 대단히 높은 명중률을 보인다. 쇠뇌는 전통적인 활에 비해 정확성에서 우위에 있었으며, 동시에 활보다 더 무거운 화살을 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발사 속도는 활의 화살보다 느리다. 쇠뇌와 활이 공존하였던 이유는 상대적으로 서로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쇠뇌는 삼국시대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 접어들어서도 여전히 중요하게 여겨졌다. 고려시대에는 삼국시대의 쇠뇌보다 다양하고 성능이 좋은 것이 개발·운용되었다고 보인다. 고려의 쇠뇌에 대한 관심은 다름 아닌 국방 정책과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2군 6위 이외에 정노(精弩)라는 쇠뇌 운용 부대가 있었다. 국방상 중요한 지역인 북계(北界)에는 쇠뇌 부대를 배치하여 운용하였으며, 연습 결과에 따라 직을 높여 주는 우대책을 시행하였다.92)『고려사』 권82, 지36, 병(兵)2 진수(鎭戍).

목종(재위 997∼1007) 때에 설치된 군기감의 공장(工匠) 가운데는 노통장(弩筒匠)이라는 쇠뇌 제작 장인이 소속되어 있었다.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쇠뇌를 제작·보급하였다. 1104년(숙종 9) 2월에 여진을 정벌하기 위하여 윤관 장군의 건의로 설치된 별무반에 정노군을 설치할 수 있었던 것도 쇠뇌의 제작이 계속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따라서 예종은 쇠뇌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정노반(精弩班)을 사열하였다.93)『고려사』 권13, 세가13, 예종 2, 예종 4년 3월 임자(壬子).

여진을 정벌을 하는데 왜 쇠뇌 부대를 두었을까? 그것은 쇠뇌가 활에 비하여 수성(守成) 작전과 매복(埋伏) 작전에 운용하기에 편리한 장점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된다. 쇠뇌는 큰 동작 없이 좁은 공간에서 시위를 노기에 걸기만 하면 상대를 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몸을 은폐·엄폐시킨 가운데 사용할 수 있었다.

『고려사』에는 “훈련된 기병이 평원에서 적을 만나 칼날을 부딪치고 화살을 쏘아 단번에 승부를 결정하는 것은 북방 기마 민족의 장점이면서 중국의 단점입니다. 성곽에 올라 강노(强弩)로 진영을 굳게 하고 지키면서 상대 가 쇠퇴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중국의 장점이면서 북방 기마 민족의 단점입니다. 마땅히 장점을 취하여…… 이는 지금의 우리 형세로는 적절한 것이니 반드시 경성 및 모든 주진으로 하여금 성을 높게 수축하고 못을 깊게 하여, 강노·독화살·돌·화전을 비축하도록 하고…….”라는 기록이 있다.94)『고려사』 권177, 열전10, 김부의(金富儀)

이 기록은 쇠뇌가 수성 작전에 얼마나 유효한지를 전해 주고 있다. 고려에서도 수성을 위해서는 성을 높게 수축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강노를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1135년(인종 13) 묘청(妙淸)의 난이 일어났을 때 상장군 이녹천(李祿千)이 이끄는 군사가 쇠뇌를 소지하고 매복하는 부대에게 궤멸되었다는 기록이 이를 대변해 준다. 이녹천의 배가 반쯤 이르러 물이 얕아서 배가 좌초하자 묘청군은 작은 배 십여 척으로 섶을 싣고 기름을 뿌려 불을 질러 조수를 따라 띄우고, 그보다 앞서 길가 숲 속에 쇠뇌를 휴대한 병사(弩士) 수백을 매복시켜 불이 남과 동시에 공격하기로 약속하였다. 화선(火船)이 접근하면서 전함에 불이 붙고 수백의 쇠뇌가 일제히 발사되자 이녹천이 낭패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시체를 밟고 언덕에 올라 겨우 몸만 면하였다는 것이다.95)『고려사절요』 인종 13년 2월.

이후 1040년(정종 6)에 서면병마도감사(西面兵馬都監使) 박원작(朴元綽)이 수질구궁노(繡質九弓弩)라는 것도 만들었다. 수질이란 ‘줌피에 수를 놓은 것’이며 구궁노란 쇠뇌 아홉 개를 연결하여 연속 발사가 가능한 연노(連弩)로 이해한 견해가 있으나96)강성문 외, 『한국 무기 발달사』, 국방 군사 연구소, 1994, 224쪽. 확실하지 않다. 화약 병기가 출현한 고려 말 이후에 쇠뇌는 중요성이 일시적으로 줄어들면서 화약 병기를 보완하는 측면에서 운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별무반의 설치는 여진 정벌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여진의 기병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기병으로 맞서야하였다. 신기군을 편성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기병만으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강궁군이라든가 정노군을 비롯한 특수 부대를 둔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기병을 중심으로 하는 무예와 강궁술을 익힌 쇠뇌 부대의 전술적 활용만이 그 대안이었던 것이다. 보병이 기병과 싸울 때는 장창을 지닌 부대를 맨 앞에 위치시키고, 다음은 강궁을 가진 부대, 그 다음은 강노를 지닌 부대가 무릎을 꿇고 대기하게 하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별무반의 설치가 어떤 효과를 거두었을까? 이에 대해 『고려사』 「병지(兵志)」의 편찬자는 별무반의 설치가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것은 별무반이 신기군과 특수 부대에 맞는 무예를 강화하였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국방 강화를 위한 예종의 관심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았다. 제도적으로 지속적인 무인 양성책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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