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2장 오백 년 사직을 지킨 고려의 무기와 무예
  • 2. 무신의 세상과 대몽 항쟁
  • 격구와 수박의 유행
김대중

별무반 설치 이후 고려의 무예는 어떤 양상으로 변모해 갔을까? 별무반의 편성은 문무의 산관·서리에서부터 천예(賤隷) 및 주·부·군·현민에 이르기까지를 대상으로 하였다. 별무반의 구성은 확실히 경군(京軍)인 2군 6위와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 별무반은 항구적인 제도로 존속한 것이 아니라 여진 정벌 이후 곧 소멸되었다. 별무반의 설치는 기존 군제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별무반 폐지 이후에는 군액(軍額)을 보충하려는 노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정규군의 부족 현상은 결국 직업 군인이 아닌 자를 경군으로 선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천계(賤系) 출신이라 하더라도 용력을 갖추면 경군에 들어올 수 있었다. 또한 특수 부대를 출현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의장(儀仗)의 역할을 담당하던 견룡(牽龍)·공학(控鶴)이 시위(侍衛)를 전담하는 부대로 변모해 갔다. 내순검군(內巡檢軍)과 같은 새로운 시위 부대가 조직되기도 하였다.117)김당택, 앞의 글.

의종대에는 군제사 측면에서 시위를 담당하던 친위군인 금군(禁軍)이 부각된 시기였다. 고려시대의 금군은 중금(中禁)·견룡·공학·순검(巡檢)·도지(都知)·백갑(白甲)·내순검 등의 부대를 말한다.118)김낙진, 『고려 금군 연구』, 서강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02. 의종은 즉위부터 외척 세력의 견제로 말미암아 불안한 출발을 보였다. 그러나 그의 왕권 강화 의지는 대단히 강하였고, 외척의 발호 억제와 왕권을 뒷받침해 줄 측근 세력을 육성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시(內侍)와 금군의 강화였다.119)이에 대한 상세한 연구는 김낙진, 앞의 책, 2002 참조. 그러면 의종대에는 어떠한 무예가 있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격구(擊毬)였다.

격구는 이미 예종대부터 시행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예종은 사열을 하고 나서 신기군에게 격구를 하게 하였으나, 의종은 격구를 관람하는 선을 넘어서 스스로 격구를 즐겼다. 의종이 지나치게 격구를 하자 대간(臺諫)에서 문제를 삼을 정도였다. 1147년(의종 원년) 5월 어사대는 격구장으로 통하는 수창궁(壽昌宮)의 북문을 봉쇄하여 군소배의 출입을 금하였다. 이에 의종은 북원에서 놀다가 “나의 격구 하는 기술을 다시 시험할 수 없다.”고 말하고, “조금 있다가 구를 잡아서 치니, 사람이 그에 미칠 자가 없었다.”고 한다.120)『고려사』 권17, 세가17, 의종 원년 5월.

의종대에 유행한 또 하나의 무예는 수박(手搏)이었다. 수박은 주로 손을 써서 상대를 공격하는 무예이다. 다시 말해 ‘도수 무예’를 뜻한다. 수박은 기록에서 찾을 수 있는 한국의 전통 무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삼국시대로부터 계승되었다. 그런데 수박은 무신 정권기에 크게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의종 또한 수박을 매우 좋아하였다.

고려 귀족 사회를 뒤엎었던 1170년(의종 24)의 무신정변도 수박희(手搏戲) 중에 일어났다. 의종은 보현원으로 행차하기 전에 주연을 열고 무신에게 오병 수박희(五兵手搏戲)를 하게 하였는데, 오병 수박희가 도화선이 되어 무신정변이 일어났던 것이다.121)『고려사』 권19, 세가19, 의종 24년 8월.

수박은 병법의 하나로 연습되었다. 수박은 두 사람이 손 또는 주먹으로 힘을 겨루는 무예였다. 오병 수박희는 의종의 호종 군사(扈從軍士) 가운데 오군 소속의 군사와 이들을 거느린 무신들을 대상으로 시행하였다. 이처럼 수박은 무인의 기초 체력을 평가하는 종목이자 군사 훈련이었다.122)심승구, 앞의 글, 248∼254쪽 참조. 훗날 무인 집정(執政)에 이르는 이의민(李義旼)은 수박을 잘하여 의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수박을 잘하여 대정(隊正)에서 별장(別將)으로 승진하였다.123)『고려사』 권128, 열전4, 반역(叛逆)2, 이의민(李義旼). 수박으로 출세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허인욱, 『옛 그림에서 만난 우리 무예 풍속사』, 푸른 역사, 2005, 243∼244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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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수박은 고려 무인들에게 널리 보급되었다. 수박희는 도박에 이용될 정도로 유행하였다.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고려 정부는 “박희(搏戲)로써 전물(錢物)을 내기한 자는 각각 곤장 100이며, 그 유숙시킨 주인 및 범(凡)을 대고, 모여서 도박을 시킨 자도 또한 장 100이며”124)『고려사』 권85, 지39, 형법2, 금령(禁令).라는 형률을 정하기에 이르렀다.

의종이 수박을 중요하게 여긴 것은 친위군, 즉 금군의 강화와 깊은 관련 있었다. 지근 거리에서 국왕을 시위하고 경호하는 금군에게 수박이 강조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금군 가운데 공학군(控鶴軍)으로 입문하였던 두경승(杜景升) 역시 수박에 대한 관심이 컸다. 공학군도 국왕의 측근에서 숙위와 호위를 맡은 부대로,125)이기백, 앞의 책, 1968, 296쪽. 사예(射藝)와 격구 등에서 최고 수준의 무예 실력을 갖춘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공학군은 임무와 관련하여 수박에 대해 관심을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박에 자질이 있다고 하여 모두 대오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두경승이 그러한 예이다. 두경승은 바탕이 질후(質厚)하고 어려서 문을 조금 익히고 용력이 있었다. 처음에는 공학군에 임명되었다. 수박을 하는 자가 두경승을 불러 대오에 삼았다. 그러 나 그의 외삼촌 상장군 문유보(文儒寶)가 이를 듣고 “수박은 천기이다. 장사가 할 바 아니다.”고 하여 두경승이 결국 대오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126)『고려사』 권100, 열전13, 두경승(杜景升).

두경승이 수박에 관심은 있었으나 대오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과 수박이 천한 기예라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천기든 아니든 수박은 금군의 임무 수행에서 여전히 중요하게 여겨졌고, 승진 또한 수박 실력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점을127)이후의 기록이긴 하지만, 최고의 권력 기구였던 중방 구성원들의 승진도 수박 실력으로 결정되었다(『고려사』 권129, 열전42, 반역3, 최충헌(崔忠獻)).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의종대 금군이 강화되었다고 해서 궁술과 검술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다. 궁검(弓劍) 또한 숙위와 경호에 필수적인 무기였던 것이다. 의종은 부병(府兵)을 궐정(闕廷)에 주둔시켜 불측한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이를 위해 용력 있는 자를 선발하여 내순검이라 부르고, 두 번(番)으로 나누어 항상 자의를 입고 궁검을 가지고 장위 밖에 나누어 서서 눈비를 가리지 않고 밤부터 새벽에 이르기까지 순경(巡警)하게 하였다.128)『고려사』 권82, 지36, 병2, 숙위(宿衛) 의종 21년 정월. 수박이든 궁술이든 도검술이든 간에 의종의 숙위와 경호를 중심으로 무예가 발달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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