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2장 오백 년 사직을 지킨 고려의 무기와 무예
  • 2. 무신의 세상과 대몽 항쟁
  • 몽고의 침략, 성곽전으로 항전한 고려
  • 몽고와 몽고군
김대중

몽고129)몽골(Mongol)이란 원래 ‘용감함’이란 뜻을 지닌 부족 이름이었으나 칭기즈 칸이 통일한 몽골 부족의 발전에 따라 민족 이름으로 바뀌었다. 몽골인은 ‘몽골’을 ‘伯(올바른·진실된·기초)’과 ‘골(중심·축)’이란 단어의 합성어로 보고 있다. 결국 ‘몽골’은 세계의 중심이라는 뜻이 된다. 몽고라는 명칭은 중화사상을 가진 중국인들이 주변 민족을 ‘몽매한 야만인’이라고 경시하면서 청나라 이후 ‘몽고’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의 원(元)은 어떻게 세워진 국가이며 언제부터 고려와 관계를 가졌을까? 몽고족은 원래 여러 개의 부로 분산되어 요(遼)·금(金)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몽고부의 테무친(Temuchin, 鐵木眞)이 부족을 통일하고 인근의 유목 민족들을 정복하여 세력을 확장시켰다. 그 결과 1206년(고려 희종 2)에 몽고 지역 전체를 통합하고 몽고족과 투르크계의 모든 유목 민족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테무친 자신은 칸(汗)에 추대되어 칭기즈 칸(Chingiz Khan)이라 칭하고 몽고 제국을 세웠다. 그리고 다음해부터 정복 전쟁을 추진하여 주위의 서하(西夏)·금·서요(西遼) 등을 정복하였고, 계속해서 서 쪽으로 진출하여 중앙아시아는 물론 서남아시아·남러시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몽고는 중국 지역을 정복한 뒤 1271년(원종 12)에 국호를 원으로 바꾸었다.

역사적으로 우리와 몽고의 관계는 13세기 초에 이루어졌다. 1219년 몽고가 대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공세에 밀려 고려 영내로 침입한 거란 유족(遺族)을 소탕해 준다는 구실이 계기였다. 몽고는 고려 영토에 진입하여 고려와 함께 거란을 소탕하였다. 양국의 인연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1225년 1월 고려에 파견된 몽고 사신이 귀국하는 도중에 압록강 유역에서 도적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몽고는 그 책임을 고려에 물었다. 그것은 고려를 침략하기 위한 명분이었다. 서역 원정에 주력하고 있던 몽고는 곧바로 고려 침공을 감행하지 못하였다. 고려를 침공한 것은 1231년(고종 18) 8월의 일이었다. 이로부터 40년 동안 고려와 몽고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그렇다면 몽고군은 어떤 군대 조직을 갖고 있었을까? 몽고족의 군사적 우월성은 기동력(속도·파괴력)과 인내·끈기에 있었다. 전체 병력의 60% 정도가 경무장 전사(가죽 투구)였으며, 이들은 소형의 활, 단창, 칼, 도끼를 사용하였다.130)이기훈, 『전쟁으로 보는 한국 역사』, 지성사, 1997, 174∼183쪽.

몽고군은 부락 제도를 그대로 군제 조직에 활용하였다. 부락에 추장이 있듯이 군대에는 통수(統帥)가 있었다. 지휘관은 가족 제도를 따르고 있어 작전 시에 칭기즈칸 휘하의 지휘관은 대부분 혈친(血親)이었다. 단결력이 높았던 이유는 바로 이 점에 있었다. 1206년에 몽고군의 조직은 10단위제로 편성되었는데, 기병 편성으로 3개의 튀멘(tümen)이 한 군단을 형성하였다. 몽고군은 10인의 부대 아르반(arban)을 기본으로, 100명의 부대인 자훈(jaghun), 1,000명의 부대인 밍한(mingghan), 1만 명인 튀멘으로 구성하였다. 몽고군은 중군과 좌우의 양익(兩翼)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정찰조를 운용하였다. 또 전초 기병을 좌우 5줄 횡진 배치(앞 2줄은 중기병)하였으며, 분산과 집중의 전술을 잘 사용하였다.131)이기훈, 앞의 책, 174∼183쪽.

몽고군의 병사들은 담요로 만든 어깨를 두르는 옷과 양피로 만든 외투를 착용하였다. 겨울에는 가죽으로 만든 옷과 가죽 모자, 담요로 만든 윗도리를 입고 가죽 구두를 신었다. 끌고 다니는 말은 줄로 연결하고 말의 어깨와 가슴에는 흉갑(胸甲)이나 쇄자갑(鎖子甲)을 둘렀다. 이들은 보리, 가열 기구, 소금, 말린 고기, 우유 제품, 가죽 물주머니, 활촉 연마용 줄칼, 송곳 또는 바늘을 휴대하였다.

몽고군의 주무기는 궁시와 군도(軍刀)였다. 활을 주로 쏘는 경기병(輕騎兵)은 두 대의 활과 두 개의 화살 주머니를 휴대하였다. 화살 하나는 길고 가벼운 비전(飛箭)이며 다른 하나는 갑옷을 뚫을 수 있는 화살이다. 몽고의 활은 상당히 강하여 당기려면 최소한 166파운드의 힘이 필요하였다. 대신 관통력이 높고 200∼300m까지 날아간다. 돌격을 위주로 하는 중기병(重騎兵)은 근도, 긴창, 도끼, 쇠추, 쇠줄거리, 단도를 휴대하였다. 일부 기수들은 상대 기병을 찍어 끌어내릴 수 있는 고리가 달린 창(戈·戟)을 지니고 다녔다. 방호 장비로는 쇠나 가죽으로 만든 방패가 있었다. 바퀴가 달린 나무 방패도 운용하였다. 성곽 공격기에 상대의 포 사격을 피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132)팽세건(彭世乾), 『몽골군 작전의 연구』, 대만 국방부 ; 김순규 편역, 『몽고군의 전략·전술』, 국방 군사 연구소, 1997, 11∼16쪽.

몽고가 철제 무기와 화포를 보유하게 된 것은 금나라 땅을 얻고 요나라를 정복하면서부터였다. 많은 기술자와 철을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회회(回回, 위구르족) 기술자들은 공성용 기구를 비롯한 무기와 장비를 잘 만들었다. 칭기즈칸은 신무기 제조와 기술자 획득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다. 이는 보병 부대를 보유하지 않고 있던 당시 몽고군은 산악 및 요새지에서 전투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몽고군은 공성 기술과 보병 전술 및 수전(水戰)에는 취약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거란군·여진군·한군 등 이민족으로 구성된 부대를 확보하여 이러한 전술상의 약점을 보완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보병 전술 전투력은 그들의 기병이 지니고 있는 전술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었다.

전쟁 초기 몽고군의 성곽 공격은 포로를 몰아붙여 성하(城河, 성곽 주위에 파 놓은 하천) 장애물을 메우거나 성곽 밖에 흙으로 토산을 쌓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후기에는 투석기(投石機)·노포(弩砲)·목탄(木彈)·소이탄(燒夷彈, 중원을 장악한 후 한인에게 배운 기술) 등을 사용하였다. 이 가운데 투석기는 중국식과 제작 방법이 달랐다. 중국식은 탄환을 멀리 던질 수 있는 동력을 많은 사람이 동원되어 탄환 주머니에 여러 갈래로 매달려 있는 밧줄을 일시에 당겨 얻었다. 그러나 몽고인들은 반동력(counterweight)을 이용하여 한쪽 편에 무거운 돌을 달고 그 반작용으로 돌을 상대에게 투석하는 트레뷰처(Trebucher)였다.133)중국에서는 이를 회회포(回回砲)라고 부른다. 몽고는 무기 제조 공장과 무기고를 설립하여 관리와 보관을 담당하는 전문인(古爾汗)을 두어 책임을 다하게 하였다.134)김순규 편역, 앞의 책, 13∼16쪽.

그러면 몽고가 고려를 침공하였을 때 사용한 무기와 장비가 어떤 것이었는지 살펴보자. 몽고의 1차 침공 때 귀주성(龜州城) 전투에서 누거(樓車)·목상(木床)·발석차(拔石車)·운제(雲梯) 등을 사용하였다. 누거는 큰 수레 위에 높은 누각을 올리고 그 위에 병사들이 올라가 성벽을 내려다보며 공격할 수 있게 만든 장비였다. 목상은 수레 위에 뚜껑을 덮어 씌워 위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막으면서 수레 안의 병사들이 성벽 밑을 파게 할 목적으로 만든 장비이다. 발석차는 바로 트레뷰처이다. 성채를 무너뜨리는 장비인 것이다. 운제는 성을 공격할 때 사용하는 구름사다리 형태의 장비이다. 아랫부분은 운제를 운용하는 병력이 들어갈 수 있는 칸막이가 있고, 윗부분은 2단계의 사다리를 만들어 성의 여장(女墻)에 거치시켜 많은 병력들이 오르내리면서 싸울 수 있도록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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