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2장 오백 년 사직을 지킨 고려의 무기와 무예
  • 3. 여원 연합군의 일본 정벌과 고려의 무기
  • 여원 연합군의 일본 정벌을 보는 시각
김대중

고려는 1274년(충렬왕 즉위년) 10월과 1281년(충렬왕 7) 5월, 두 차례에 걸쳐 원나라가 단행한 일본 정벌에 동원되었다. 일본 원정을 위해 고려는 병력·전함·병기와·군량미 등을 부담하였다. 그 결과 고려는 인적·물적 면에서 피해가 컸다.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이하 여원 연합군)의 이름으로 단행된 일본 정벌은 고려로서는 원치 않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일본 정벌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또 여원 연합군은 어떻게 편성되었으며, 전쟁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고려는 원나라의 일본 정벌에 동원되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 그리고 원나라의 간섭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일본 정벌에 동원되었던 고려였지만, 그 많은 부담을 안을 수 있었던 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원 연합군의 일본 정벌에 대한 우리의 연구는 일본에 비해 상당히 소홀하다. 개설서나 교과서에서도 사실적인 점을 중심으로 간단히 다루고 있 을 뿐이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하나는 일본 정벌이 결과적으로 실패한 전쟁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원나라의 간섭을 받았던 고려가 불가피하게 전쟁에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중국 또한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에 반해 이 주제에 대한 일본에서의 연구는 매우 깊이 있게 이루어지고 있다. 『몽고 습래 관계 문헌 목록(蒙古襲來關係文獻目錄)』에는 1880년대부터 2001년 10월까지 발표된 약 1,000편에 달하는 논저를 수록하고 있다. 일본은 자국 역사상 최대의 승전(勝戰)으로 바로 ‘일본 정벌’을 생각할 정도이다. 일본에서는 이 전쟁을 전쟁이 발발한 해의 연호를 따서 ‘분에이(文永)의 역(役)’이나 ‘고우안(弘安)의 역(役)’ 혹은 ‘이국합전(異國合戰)’이라고 불렀다. 또 상대방에 대해서는 ‘원구(元寇)’라고 하며 ‘몽고 습래(蒙古襲來)’라는 비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일본 정벌’에 대한 일본의 평가에는 국수주의가 바탕에 깔려 있다고 하기도 한다. 여원 연합군의 일본 정벌이라는 전쟁에서 승리자는 바로 일본이며, 일본은 자신들이 신의 보호를 받는 신국(神國)이라는 확신을 얻었다고 여긴다. 이때 자신들을 도와 준 자연 현상이 바로 ‘카미가제(神風)’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전쟁을 일본인의 지혜와 단결을 과시한 방어전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신무기를 앞세운 몽고 야만 유목민의 침구를 문명 일본이 침입을 격퇴한 역사적 사건이라고도 한다.

일본에서는 학문적 연구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의 관심도 높아졌다. 2001년 봄부터 일본 국영 방송에서는 ‘일본 원정’ 당시의 집권자였던 호조 토키무네(北條時宗)를 세계 최강의 군대를 막아낸 영웅으로 묘사한 대하드라마를 방영하였다. 많은 제작비를 투입하였고, 시청률도 높았다고 한다. 최근 일부 내부에서 일고 있는 국수주의적 성향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또 같은 해에 후쿠오카 시립 박물관(福岡市立博物館)에서는 ‘호조 토키무네와 그의 시대’라는 이름으로 특별전을 개최한 바 있다. 확실히 우리의 관심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140)이재범, 「여원 연합군의 일본 정벌과 『동방견문록』」, 『군사』 50, 군사 편찬 위원회, 20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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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습래회사 중 해전
몽고습래회사 중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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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원 연합군의 일본 정벌을 그린 몽고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에는 고려군의 뛰어난 조선술과 맹활약을 하는 고려 수군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어 고려의 국력을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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