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2장 오백 년 사직을 지킨 고려의 무기와 무예
  • 3. 여원 연합군의 일본 정벌과 고려의 무기
  • 여원 연합군의 일본 정벌과 고려의 무기
김대중

고려가 원나라의 일본 정벌에 동원된 시기는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을 받고 있던 때였다. 이러한 고려의 현실은 충렬왕이 원 세조의 딸을 왕비로 맞아 부마국(駙馬國), 즉 사위나라가 된 이후 양국의 왕실이 일가(一家)의 관계를 맺으면서 심해져 갔다. 한마디로 원의 식민지적 간섭을 거부할 수 없던 것이 바로 고려의 현실이었다. 그 첫 번째 시련이 바로 원나라의 일본 정벌에 고려가 동원된 일이었다.

원나라의 일본 정벌은 세계 제국을 건설한다는 목표 아래 단행되었다. 세조 쿠빌라이는 천하통일을 이루어 몽고 대제국을 건설할 꿈을 가지고 있었다. 원나라가 일본을 정복할 계획을 세운 동기에 대해서는 송대 이래 형성되어 온 동아시아 교역권 및 정치적 질서 유지를 재건하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또한 고려·일본·남송의 연결을 막으려는 원나라의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원나라의 입장에서 고려는 일본에 가장 근접해 있는 거점이었다. 원나라가 군량미와 함께 전함까지도 고려에서 얻을 수 있다면 일본 정벌을 한결 유리한 조건에서 할 수 있게 된다. 원나라가 일본 정벌에 고려를 끌어들인 의도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국의 전쟁에 남의 나라를 끌어들이며 전쟁에 소요되는 비용은 공동으로 부담하자는 것이다. 원나라는 고려에게 일본을 정벌하기 위한 부담을 하게 하는 조건을 만들어 갔다. 원나라의 간섭을 받아야 하던 고려로서는 이 제안을 거부하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원나라는 고려에게 몽고 사신을 안내하여 일본을 달래는 초유(招諭) 역할을 해달라고 하였다. 원나라가 일본 정벌에 고려를 끌어들이려는 속셈이었다. 원 세조는 고려와 우호를 다져가는 과정에서부터 고려를 일본의 초유에 이용할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가 몽고에게 이러한 요구를 받은 것은 1266년(원종 7)의 일이었다.141)『고려사』 권26, 세가26, 원종 2, 원종11년 계축. 몽고의 사신 흑적(黑的)과 홍은(弘恩)이 일본에 들어가는데 고려의 초유사(招諭使)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고려는 원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전쟁에 휩쓸려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원나라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할 수도 없었다.

고려 정부는 이장용(李藏用)을 중심으로 하여 소극적인 방법으로 원의 요구에 협조하는 길을 택하였다. 원의 요구가 있었던 1266년(원종 7)에 초유사 송군비(宋君斐)·김찬(金贊)를 임명하여 원나라의 사신을 호송케 하였다. 그러나 초유사로 파견되었던 이들은 거제도에 이르러 풍파가 험하여 이듬해 정월에 귀환하였다. 그러자 몽고는 1267년(원종 8) 8월에 또다시 고 려에 일본 초유를 위임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본 측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0여 차례에 걸쳐 몽고인과 고려인이 일본에 파견되었으나 구류되거나 피살되어 결국 몽고의 일본 초유책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일본 초유책에 실패한 원나라는 고려를 거점으로 삼아 병력과 전함과 군량미를 확보하여 일본을 정벌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목적에서 원나라가 고려에 설치한 것이 바로 둔전경략사(屯田經略司)였다. 군량미를 확보할 전담 기관을 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전쟁에 필요한 함선과 군사 동원까지도 부담시켰다. 1274년에 단행된 제1차 일본 원정에 동원된 2만 5000명 가운데 고려 군사가 무려 8,000명이나 되었다. 또 뱃사공 6,700명, 전함 900척이 동원되었다. 제2차 일본 원정 때는 고려가 군사 1만 명, 사공 1만 5000명, 전함 900척, 군량 11만 석을 부담하였다. 많은 무기도 제작하여 전쟁에 참전해야 하였다. 몽고와 오랜 전란을 겪은 고려가 이러한 부담을 감당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제1차 일본 원정 때 몽한군(蒙漢軍)은 원의 도원수 흔도(忻都, 또는 홀돈(忽敦)), 부원수 홍다구(洪茶丘)가 지휘하였고, 고려의 군사는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하였던 김방경(金方慶)이 지휘하였다. 여원 연합군이 900여 척의 전함에 나누어 타고 합포(合浦, 경남 마산)에서 출항한 것은 10월 3일이었다. 이틀 동안 항해한 끝에 출격하여 쓰시마 섬(對馬島)의 사스가우라(佐須浦)를 점령하였다. 이로부터 10여 일 후인 14일 이키 섬(壹岐島)의 서안을 침공하였다. 이어 16, 17일 이틀 동안에는 기타규슈(北九洲) 연안에 침입하여 다수의 주민을 포로로 삼았다. 19일 여원 연합군의 한 부대가 이마즈(今津)에 상륙하였고, 동시에 다른 한 부대는 하카다(博多)의 북방인 가고하라(鹿原)에 상륙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부대는 하카다의 하코자키(箱崎) 방면에 상륙을 시도하였다. 여기서 왜군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원정군은 결사적으로 저항하는 왜군을 무찌르며 진격을 하였으나 겨울 석양이 깃들어 계속 공격을 하기가 어려웠다. 후퇴하여 전함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다시 진격하였으나 왜군을 완전히 진압하지 못하고 석양이 기울자 다시 해상으로 완전 철수하였다. 이날 밤부터 태풍이 세차게 몰아쳤다. 일본에서 말하는 이른바 카미가제인 것이다. 전함들은 동요하고 전복하고 침몰하였으며 군마(軍馬)는 놀랐다. 더욱이 고려의 원정군은 해전에 미숙하였다. 태풍의 소용돌이와 산채 같은 파도로 원정군은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방전에서는 왜군을 무찔러 승리를 거듭하였지만, 예상치 못한 태풍 때문에 원정군은 비참한 모습으로 합포항에 돌아왔다. 돌아오지 못한 여원 연합군은 1만 3500명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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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원 연합군의 일본 정벌 지도
여원 연합군의 일본 정벌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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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원정에 실패한 원 세조는 이후에도 일본 정벌의 야망을 포기하 지 않았다. 일본에 초유사를 계속 파견하면서 전쟁 준비를 하였다. 이를 위해 원나라는 1280년(충렬왕 6) 고려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설치하였다. 충렬왕도 전과는 달리 일본 정벌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원나라와 관계를 좋게 하는 것이 고려 왕실에 유리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고려 출신으로 원나라의 장수를 지낸 홍다구의 횡포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일본 정벌에 대한 충렬왕의 입장 강화는 고려의 부담을 크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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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습래회사 중 육전
몽고습래회사 중 육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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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일본 정벌을 위한 병력은 고려에 위치한 정동행성 휘하의 고려군과 몽한군, 중국의 강남 지방에 위치한 정일본행성(征日本行省) 휘하의 강남군으로 구성되었다. 원나라는 1차 정벌 때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몽한군 3만 명 이외에 송(宋)나라에서 항복해 온 장수 범문호(范文虎)가 지휘하는 강남군 10만을 더 출전토록 하였다.

출전은 1281년(충렬왕 7) 5월에 있었다. 김방경 휘하의 고려군과 흔도·홍다구 휘하의 몽한군·동로군(東路軍)은 900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합포를 떠나 이키 섬으로 향하였다. 강남군도 3,500척의 배를 동원해 현지를 떠나 이키 섬으로 향하였다. 양군은 이곳에서 만나 합공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강남군은 실제로 약속한 날보다 훨씬 뒤에 도착하여 작전에 큰 차질을 가져왔다. 더욱이 또다시 태풍을 만난 원정군은 10만여 명의 병력을 잃게 되는 타격을 받았다. 뱃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후 원 세조 는 계속 일본 원정을 준비하였지만 1294년(충렬왕 20)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뜻하던 일본 정벌의 꿈은 결국 이루지 못하였다.

그런데 700년 전 여원 연합군의 일본 정벌을 생생하게 그린 그림이 일본 구마모토(熊本)현 다케자키(竹埼) 마을의 토후쿠지(塔福寺)에 전해오고 있다. 바로 몽고습래회사이다. 모두 두 권으로 되어 있는데 전권은 그림 열 폭에 글 아홉 편, 후권은 그림 11폭에 글 일곱 편으로 되어 있다. 세로 39㎝로 된 그림을 모두 합한 길이는 약 44m이다. 이 그림은 당시 여원 연합군에 맞서 싸운 무사 다케자키 스에나가(竹埼季長)의 활약상을 큰 줄거리로 삼고 있다. 당시 이 지역의 영주였던 스에나가가 전쟁에서 자신이 싸운 모습을 화가에게 그리게 한 것이다. 이 그림을 통해 고려의 무기를 확인할 수 있다.

몽고습래회사에는 무기뿐만 아니라 군사들의 모습도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그림에서 고려군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고려군은 갑주를 착용하고 활을 쏘고 있다. 당시의 주력 무기는 활이었다. 해전과 상륙이 전투에서 중요하였기 때문에 활은 매우 중요한 무기일 수밖에 없었다. 고려의 활은 길이가 120㎝가량이었다. 한편 후쿠오카(福岡)의 하코자키(箱崎)궁에는 연합군의 활이 유물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142)KBS 역사 스페셜, 「여몽 연합 함대 일본 원정의 주력은 고려군이었다」, 『역사 스페셜』 6, 효형 출판, 2003, 122∼135쪽 참조. 몽고습래회사에서 볼 수 있듯이 고려군은 항상 선두에서 싸우고 있다. “박지량(朴之亮), 김흔(金忻), 조변(趙抃), 이당공(李唐公), 김천록(金天祿), 신혁(申奕) 등이 힘써 싸워 왜병을 대파하니 그 시신이 마(麻)와 같았다. (원의 총사령관인) 홀돈(忽敦)이 ‘몽고군이 싸움에 익숙하지만 어찌 고려군에 비하리오.’라고 말하였다.”는 『고려사』의 기록은143)『고려사』 권104, 열전17, 김방경(金方慶). 고려가 얼마나 전투를 잘하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원 연합군의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정벌은 태풍으로 완전 실패로 끝났다. 일본 정벌에 따른 고려의 피해는 매우 컸다. 인명 피해뿐만 아니라 원정에 동원되었던 군량미와 군선 등이 모두 고려의 지원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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