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2장 오백 년 사직을 지킨 고려의 무기와 무예
  • 4. 화약 병기 시대의 개막
  • 왜구 격퇴의 선봉장, 화약 병기
김대중

화약 병기를 국내에서 생산하게 된 고려는 이제 왜구 격퇴에 나섰다. 특히 활과 화살, 창과 검에 의지하던 고려 수군은 이제 화약 병기의 보유로 커다란 전술 변화를 이룩하였다. 즉 기존에 보유하고 있는 무기만으로 왜구의 선단을 격침시켜 침략을 근절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웠지만 화약 병기의 개발로 전술의 변화를 꾀할 수 있었다. 종래의 수군 전술은 적선을 부딪쳐서 깨뜨리는 이른바 당파 전술(撞破戰術)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화약 병기의 개발로 당파 전술에 전함에서 포를 쏴서 적을 제압하는 함 포 전술(艦砲戰術)을 가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최무선이 그동안 개발한 화약 병기를 최초로 해전에 사용한 것은 1380년(우왕 6) 8월 진포(鎭浦, 금강 입구) 해전이었다. 왜구는 내륙 침략의 거점으로 삼기 위하여 진포를 침략하였다. 왜구는 전선 500척을 크고 작은 선단으로 나누어 편성하고 이를 큰 밧줄과 쇠사슬로 서로 잡아매고 배와 배 사이에 사람과 말이 왕래할 수 있도록 널빤지를 걸어 놓았다. 왜구의 정찰조가 이 대소선 사이를 왕래하면서 고려군의 접근을 경계하였다. 고려에서는 최무선, 나세(羅世), 심덕부(沈德符)가 100척의 전선으로 왜구 토벌에 나섰다. 고려의 전선 수는 왜구의 5분의 1에 지나지 않았으나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 병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왜구의 선단은 고려 수군의 규모가 미약한 것을 보고 일제히 공격하였다. 여러 척의 전선을 묶어서 구성한 선단의 대오를 그대로 유지한 채 고려 선단으로 접근해 왔다. 왜구는 소규모의 고려 선단과 근접전을 벌여 제압하려고 하였다. 왜구의 선단이 고려 수군의 선단에 가까이 다가오자 화포로 무장한 고려의 전선들은 일제히 함포 사격을 가하였다. 고려군의 함포 사격으로 왜구의 선단은 불길에 휩싸여 연기와 화염이 온 바다를 뒤덮었다. 승선하고 있던 왜구는 대부분 불에 타 죽거나 바다로 뛰어 들었다. 이 광경을 『고려사』는 “시체가 바다를 덮어 피의 물결이 굽이칠” 정도였다고 전하고 있다.154)『고려사』 권134, 열전47, 신우2 ; 『고려사절요』 권31, 신우 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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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도권』 중 약탈
『왜구도권』 중 약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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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전에서 왜구의 선단 500척은 거의 불탔으며, 2만 명에 달하는 승선 인원도 대부분 섬멸되었다. 진포에서 고려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화약 병기를 이용한 함포 전술을 가미한 데 있었다. 이때부터 고 려 수군은 종래의 근접전에서 원거리 공격으로 자연스럽게 전환하였다. 진포 해전은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 병기를 최초로 사용하여 진가를 확인한 전쟁이었고, 왜구와의 전쟁에서 주도권을 잡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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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도권』 중 전투
『왜구도권』 중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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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화약 병기가 또다시 위력을 보인 것은 1383년(우왕 9) 정지(鄭地) 장군의 관음포 해전이었다. 1383년 5월 왜구는 120척에 달하는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남해현에 침구하였다. 당시 정지 장군은 왜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47척의 선단을 이끌고 전투에 나섰다. 왜구는 고려 선단 가까이에 접근하여 공격해 왔다. 이에 고려군은 왜구를 향해 화포 공격과 함께 화살을 퍼부었다. 고려는 화포 사격으로 140명씩 승선한 왜구의 전선 20척 가운데 17척을 불태워 침몰시켰고, 승선 인원 2,400여 명을 섬멸하였다.

화약 병기로 왜구를 격퇴한 고려는 1389년(공양왕 1)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 섬(對馬島)을 토벌하였다. 고려는 왜구를 근절시키기 위하여 성을 수축하고 수군을 증강시켰으며 화약 병기를 개발하였다. 그런데도 왜구의 침략은 끊이지 않았다. 1389년 경상도원수(慶尙道元帥) 박위(朴葳)는 전함 100척을 이끌고 쓰시마로 가서 왜구가 저항할 태세를 갖추기 전에 신속하게 해안에 정박해 있던 왜구 선박 300여 척과 가옥을 모두 불태웠다. 그는 왜구에게 포로가 되었던 고려인 100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쓰시마 섬 토벌은 그동안 왜구에게 일방적으로 침략을 받아 왔던 고려가 공세적 입장으로 전환한 계기가 되었다.155)이재범 외, 『왜구 토벌사』, 국방 군사 연구소, 1993, 165∼167쪽. 쓰시마 섬 토벌 이후 왜구의 고려 침략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우리 손으로 만든 화약 병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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