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3장 부국강병의 토대, 조선 전기의 무기와 무예
  • 1. 부국강병의 길
  • 군사 훈련으로서의 무예
  • 조선의 군사 퍼레이드, 대열과 강무
박재광

조선시대 왕은 해마다 농한기인 봄과 초겨울에 전국에서 군사들을 동원하여 직접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는데, 이 훈련이 대열과 강무이다.

대열은 전국에서 징발한 군사들을 대상으로 전투 대형인 진법 훈련을 실시하고, 여기에 국왕이 친히 나가 사열하는 것이다. 일명 친열(親閱)이라고도 하는데, 1432년(세종 3)에 처음 시행되었고, 이후 1451년(문종 원년)에 진법으로 확정되었다.

조선시대의 군사 전술이라 할 수 있는 진법은 오행(五行)에 입각하여 전군을 다섯 부대로 나누어 중앙에 사령부가 위치하고, 전후좌우에 네 부대가 배치되어 중앙을 둘러싸는 형태였다. 왕이 전투에 참여하면 당연히 중앙 사령부가 되었다. 유사시에는 중앙 사령부를 포함한 다섯 부대가 전황에 따라 수시로 대형을 바꾸어 전술을 구사하였다. 적의 공격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하면 후퇴하고, 반대로 적이 약점을 보이면 곧바로 돌격해 들어가야 하였기에 전 병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승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진법 훈련이란 전쟁 상황을 가정하고 중앙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전후좌우의 부대 병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도록 반복하여 훈련하는 것이다. 진중에서 명령을 전달할 때는 시각과 청각을 이용하거나 직접 전령을 보냈지만, 전투 중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 전령이 왕복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렸으므로 진법 훈련에서는 주로 깃발, 북, 징을 이용하여 지휘·통제하였다. 깃발은 시각을, 북과 징은 청각을 이용한 것이다.

왕이 직접 참석하는 대열에는 적게는 1만 명에서 많게는 10만 명 내외의 병사들이 동원되었다. 10만 명 중에서 약 3만 명은 직접 대열에 참가하고 나머지 군사들은 보급을 맡거나 대기하였다. 대열은 1만 명에서 3만 명 정도의 병사들이 국왕 앞에서 진법을 시범을 보이는 대규모 행사였기에 성 밖의 넓은 평지에서 시행되었고, 어떤 때는 한양을 벗어나 경기도 지역에서 하기도 하였다. 반면 나라에 흉년이 들거나 전염병이 돌면 대열을 중지하기도 하였다.

대열은 세종·문종·세조를 거치면서 좀 더 상세히 규정되었는데, 특히 병법에 관심이 많았던 문종과 세조대에 진법과 대열에 관한 세부 사항이 정해져 조선시대의 기준이 되었다. 대열은 전쟁 사항을 가정하여 아군과 적군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 기본적인 훈련과 함께 전면적인 공격과 방어 전술을 펼치게 된다. 이때 병사들은 실감나도록 화살촉을 뺀 활을 쏘거나 날을 헝겊으로 묶은 창이나 칼로 서로를 베기도 하였다. 수만 명의 기병과 보병이 함성을 지르면서 접전하는 광경은 실제 전쟁을 방불케 하였다. 대열이 끝나면 왕은 수고한 대소 신료(大小臣僚)나 훈련을 잘한 병사들을 선발하여 상을 주었다. 또 병사들의 사기를 드높이기 위해 무과를 시행하기도 하였다.

한편 강무는 국왕이 군사를 동원하여 일정 지역에 출동한 다음 그 지역에서 사냥하고 복귀하는 일련의 활동을 말한다. 이러한 강무는 중국 고대의 주(周)나라에서 유래하였지만, 삼국시대 국왕이 직접 병력을 거느리고 전쟁에 참여하였던 전통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궁궐 내에 생활하는 것을 답답하게 여겨 수시로 야외로 나갈 기회를 찾았는데, 이를 유교적 국가 운영과 부합시키는 방법으로 강무 제도를 도입하였다. 이후 태종 때에 사냥 절차를 규정한 수수법(蒐狩法)이 제정되고(1402), 군사의 동원과 무기 사용에 관한 규정인 강무사의(講武事宜)가 제정되어(1414) 한 해에 봄가을 두 차례의 강무가 제도화되었 다. 나아가 세종대에 편찬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군례 의식편에 강무의가 수록됨으로써 조선 왕조의 한 제도로 명시되었다.

강무를 시행한 목적은 첫째, 농한기에 군사를 훈련시켜 유사시 전투 병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둘째는 사냥으로 잡은 짐승을 종묘 제사에 올리려는 것이고, 셋째는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짐승을 잡아서 농사를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국왕의 국토 순시와 민정 파악의 목적도 있었다.

강무는 봄에는 2월 초, 가을에는 10월 초에 10여 일 동안 시행하는 것이 상례(常例)였다. 강무장은 처음에는 경기·강원·충청·전라·황해도 등의 여러 곳에 있었으며, 강무장으로 지정되면 민간의 출입이 통제되고 사냥이 금지되었다. 이는 중국 고대에 천자(天子)의 사냥터로 상설화된 구역이 존재하였던 것과는 다른 것이다. 강무장으로 지정될 경우 고을에서는 강무할 때의 국왕 접대와 군사 활동에 따른 민간의 피해뿐만 아니라 강무장 출입 통제로 인해 불편이 야기되기 때문에 강무장으로 지정되는 것을 기피하였다. 그리하여 강무장은 몇 차례 정비 과정을 거쳐 경기에 한 곳, 강원에 세 곳으로 정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태종 때 23회, 세종 때 30회 등 강무가 활발히 시행되었으나, 세조 때에는 9회로 크게 줄어들면서 성종 때 이후 점차 군사 훈련이라는 본디 기능이 약화되고 제물 마련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사냥에 치중하는 경향으로 변질되어 갔다. 이는 성종 때 이후 승평(昇平, 나라가 태평함)이 계속된 시대적 상황에서 전반적인 조선 왕조의 군사력 약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강무는 기본적으로 군사 동원 훈련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동원되는 군사의 규모는 초기 수천에서 점차 2∼3만 명으로 증가되었다. 이들의 동원 절차는 군정에 기초하여 국왕의 명에 의해 발부되는 병부(兵符, 군대를 동원하는 신표로 쓰던 동글납작한 나무패)를 통해 이루어졌다. 동원된 군사는 평소 거주지에서 훈련받은 진법의 숙달 정도를 점검받고, 각급 제대로 편성되어 강무장에서 몰이꾼으로 활용되었다. 이를 통해서 명령 체계를 숙달시키고 군율을 지키게 하며 전투에 대한 공포감과 두려움을 없애고 담력을 키울 수 있었다. 특히 강무는 직접 활을 쏘면서 사냥을 하기 때문에 대열보다 더 실전에 가까웠다.

이러한 조선 초기의 강무 시행은 군액(軍額) 확대와 연계되어 이 시기 군사력을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으나 16세기 이후 강무 시행이 해이해지면서 군사력 또한 약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강무는 직접 활을 쏘면서 사냥을 하기 때문에 대열보다 더 실전에 가까웠으며 하나의 산 전체를 둘러싸야 하기 때문에 강무에 동원되는 병사의 수도 대열에 못지않게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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