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3장 부국강병의 토대, 조선 전기의 무기와 무예
  • 1. 부국강병의 길
  • 군사 선발을 위한 무예
  • 격구와 모구
박재광

조선시대에 행해진 여러 가지 무예 가운데 가장 특색 있는 무예라 할 수 있는 격구는 서양의 폴로(Polo) 경기와 유사한 공놀이로 말을 타고 하던 기마 경기인데, 무과의 정식 과목이었다. 격방(擊棒)은 타구(打毬), 봉희(棒戲)라고도 하는데 요즘의 골프와 비슷한 놀이였다.

격구는 고려시대부터 유행하였는데, 이성계가 말을 타고 격구를 하며 여러 가지 기예를 잘 발휘하여 많은 사람이 감동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성계는 조선 건국 이후에 격구를 장려하지 않았고 구장도 만들지 않았다. 이유는 격구가 기녀(妓女)까지 동원하여 노는 등 호화스러운 놀이이기 때문이었다.

이후 세종이 1427년(세종 9) 3월에 총제 문효종(文孝宗)과 훈련원(訓練院) 제조(提調)에게 명하여 군사들에게 격구를 가르치게 하고 격구장 30개를 하사하였다. 이로써 격구가 조선시대에 널리 시행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같은 달 10일에는 사간원(司諫院)에서 “고려 말에 이르러 유관희학(遊觀戲謔)이 되어 호협(豪俠)한 풍조만 조장할 따름이며 선유(先儒) 주자(周子, 북송의 유학자 주돈이(周敦頤)를 일컬음)도 타구를 무익한 것 하였으니”라고 하며 격구를 중지할 것을 상계하는 등 반대 여론도 있었으나, 세종이 “어찌 폐해만 있다는 말이냐 무사들에게 무예를 배우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하며 강행하였다.156)『세종실록』 권30, 세종 7년 11월 을묘. 이후 세종이 모화관(慕華館,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곳)에 나가 기사와 격구를 관람하였다는 기록은 많이 보이며,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도 격구에 관한 기록이 있다.157)『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제44장. 특히 세종대왕은 격구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격구를 잘하는 사람이라야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할 수 있으며, 창과 검술도 능란하게 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격구는 구를 막대기, 즉 장시(杖匙)로 치면 구문(毬門)으로 나가 다시 들어맞고 되돌아와 말의 두 다리 사이를 빠져나가는 등 기예가 다양하였다. 격구 방식은 병사들의 훈련에 의하여 여러 가지로 행해졌다. 특히 격구 경기에서 사용하는 장시(杖匙)는 서양의 폴로에서 쓰는 망치 모양이 아니라, 속이 뻥 뚫린 숟가락 모양이었는데, 거기에 공을 퍼 담아 다양하게 공을 움직였기에 마상 무예의 다양한 기술들이 녹아 있다. 실제로 격구 경기를 보 면 기마술과 함께 다양한 마상용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무예 실력이 요구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세종대에 완성된 격구 방식은 성종대로 이르러 무과 시험의 과목으로 채택되었고,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법제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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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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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격구와 유사한 무예로 모구가 있다. 모구란 글자 그대로 털공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모구는 이 털공을 활로 쏘아 맞히는 형식의 무예를 가리키는 말로 썼다. 따라서 모구를 사모구(射毛毬), 사구(射毬)라 하였다. 모구의 생김새는 싸리나무로 만든 공으로 오늘날의 세팍타크로 공과 비슷하다. 이 나무 공을 토끼털 같이 털이 난 가죽으로 싼 것을 모구라고 하였다. 크기는 큰 것이 수박만 한 것도 있었으며, 소위 기구(氣毬)라는 것과도 같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모구는 종류가 다양하며, 오늘날의 축구공이나 농구공 정도의 크기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모구는 그냥 서서 활을 당겨 털공을 맞히는 방식이 아니고,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로 털공을 맞히는 방식의 무예였다. 다시 말해 사모구는 모구에 고리를 달아 실을 매어 앞사람이 말을 타고 끌고 가면, 뒷사람이 말을 타고 달리면서 무촉전(無鏃箭)이라는 촉이 없는 화살로 쏘는 방식이었다.

모구에 관한 기록은 1416년(태종 16) 7월에 대궐 내에 사청(射廳)을 지어 군사 훈련을 하자는 의견이 대두될 때 처음 언급되었고,158)『태종실록』 권32, 태종 16년 7월 을사. 같은 해 8월에 태종이 군기감(軍器監)으로 하여금 몸체가 큰 모구 여섯 개를 제작하도록 하였으나159)『태종실록』 권32, 태종 16년 8월 임술. 이후에 모구를 시행하였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 공식적으로 행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공식적으로 모구가 시행된 것은 1424년(세종 6) 12월이었다. 당시 세종은 경복궁 내의 경회루에서 군사와 귀화한 야인(野人)을 불러 모아 처음으로 모구를 쏘는 것을 관람하였다. 이때 모구를 세 번 쏘아 세 번 다 맞춘 자 에게 각궁 하나씩을 하사하였는데, 모구를 쏘는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모구가 조선 왕조에 들어와 처음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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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감영도병 중 모화관
경기감영도병 중 모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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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무예 훈련을 위한 방편으로 모구는 계속 시행되었다. 1431년(세종 13) 3월 9일과 18일, 1435년(세종 17) 5월 18일에는 모화관에 행차하여 군사들에게 모구를 쏘도록 하였다. 당시 세종은 병조에 전지(傳旨)를 내려 “‘무예를 연마하는데 모구만 한 것이 없다.’고 하고 이 때문에 옛사람들이 모구를 중요시하였다.”고 역설한 뒤 “세자로 하여금 병조 진무(鎭撫)를 이끌고 매일 군사 300명으로 하여금 모화관에서 모구를 쏘게 하라.”고 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세종은 모구가 무예 연마에 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말을 타고 계속 움직이면서 활을 쏘아 모구를 맞혀야 하기 때문에 기마술과 궁술에 능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에는 대외 정책과 관련하여 기병과 마상 무예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1437년(세종 19) 9월부터 매일 모화관에서 모구를 연마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후 모구는 군사 무예의 하나로 지속적으로 시행되었고, 우수한 군사들에게는 상이 내려졌다. 모구가 무예 훈련에 크게 효과가 있었지만, 당시 무과를 비롯한 각종 무예 시험의 과목으로 채택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자세하지는 않으나 아마 기사, 격구와 같이 마상에서 행하는 다른 무예와 중복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처럼 모구의 시행은 세종대에 마련된 군사 훈련의 정비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이루어졌다. 특히 모구는 매년 9월, 10월 중에 도성 밖에서 실시하는 대열 때에 주로 행하였다. 모구는 보사, 기사, 기창 등과 함께 교련과 열병이 끝난 후에 군사들의 기예를 테스트할 때 주로 채택한 무예의 하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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