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3장 부국강병의 토대, 조선 전기의 무기와 무예
  • 1. 부국강병의 길
  • 군사 선발을 위한 무예
  • 창술, 삼갑창
박재광

조선시대에 무사들의 본격적인 무예 훈련은 무기에 따라 크게 궁술·창술·검술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문헌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궁술과 창술이다. 이는 조선 전기의 전술과도 관련되는 것으로 『경국대전』에 규정된 무과의 시험 과목에도 주로 궁술과 창술만 보일 뿐이다.

활과 더불어 실전에서 사용되는 무기가 바로 창인데, 창술은 궁술과 함께 장수의 자질을 테스트하는 기본적인 무예였다. 무과의 무예가 궁술과 창술로 짜인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다만 창술도 보병용 창술이 아닌 기병용 창술, 즉 마상 창술인 기창을 연마하였다. 기창술을 보창술보다 중요하게 여긴 까닭은 기병 위주의 전술 때문이다. 따라서 세종대에 창술을 보창세(步槍勢)와 기창세(騎槍勢)로 구분하여 제도를 정비하였지만, 무과를 비롯한 각종 무예 시험에서는 보창술을 제외하고 모두 기창술만을 채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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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창
조선시대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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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기창을 말을 타고 창술을 행하는 무예라고 해서 일명 ‘마창(馬槍)’이라고 하였다. 기창을 중요시한 까닭은 “기사가 무예를 익히는 데에는 창을 쓰는 것이 제일이다.”라 하여 마상에서 연마하는 무예 중 가장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말을 타고 달리면서 두 손을 이용하여 긴 창을 자유롭게 휘두르거나 목표물을 맞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창은 말을 타고 전투를 벌일 때에 매우 중요한 무예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기병술 가운데 기마 교전에 대비한 무예 체계가 요구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 왕조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달아나는 적을 쏘아 죽이는 무예를 마련하였다. 그러한 무기 체계의 하나로 고안된 것이 바로 삼갑창(三甲槍)이다. 삼갑창은 기창 교전에 대비한 실전용 마상 무예의 하나였다. 삼갑창이 처음 나타난 것은 1460년(세조 6) 6월이었다.160)『세조실록』 권20, 세조 6년 6월 신해. 당시 모화관에서 군사 훈련을 마친 후에 무사를 뽑아 삼갑사(三甲射)와 삼갑창을 익히게 하였던 것이다.

삼갑창의 훈련 방식은 군사를 세 그룹으로 나누어, 겉옷 위에 색깔을 달리한 헝겊을 달아 표식을 다르게 한 후 각 그룹에서 두 명씩 모두 여섯 명의 군사들이 말을 타고 쫓고 쫓기는 상황 속에서 교전을 벌이는 방식이다. 이들은 쇠 창날 대신에 가죽으로 싼 창날이 달린 창을 사용하는데, 이를 피두창 (皮頭槍)이라 하였다. 또 피두창에는 붉은 물감을 묻혀 두어 교전이 종료된 후에 상대에 묻은 물감을 통해 찌른 숫자를 확인하여 승부를 결정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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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탈환도의 창 사용 장면
평양성탈환도의 창 사용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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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삼갑창은 세 명이 말을 타고 서로 쫓고 쫓기면서 상대를 찌르는 방식의 무예였던 만큼, 무예 훈련으로서뿐 아니라 관람용 유희로서 볼 만하였던 모양이다. 이에 세조는 중궁과 함께 경회루에 나가 삼갑창을 자주 구경하기도 하였다.

삼갑창도 모구, 삼갑사와 더불어 대열이나 습진 후에 시행하는 관무재의 시취 대상이었다. 그러나 화약 병기의 발달로 점차 기마 무예가 위축되기에 이르렀고, 이로써 삼갑창도 시행이 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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