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3장 부국강병의 토대, 조선 전기의 무기와 무예
  • 1. 부국강병의 길
  • 군사 선발을 위한 무예
  • 격검
박재광

조선시대는 무인들 개개인의 단병 기술이나 군사적 훈련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유교적 덕목을 더욱 강조하였다. 따라서 무인들은 유교적인 무인 정신이 강조되는 새로운 무인으로 변해 갔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로 인해 도검을 만드는 장인들 또한 고유의 장인 정신이 없었고, 기능적인 무기 생산에 그쳐 전대의 뛰어난 세공 기술을 이어 가지 못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무예를 장려하여 신라 때의 격검과 유사한 교육적 훈련이 군에서 시행되었으며, 궁중에서 종친과 문무관 사이에도 이러한 격검이 유행하였고 왕이 친히 시열(試閱)한 예도 많았다.

태종은 갑사와 방패군의 목창·목검·목정(木鋌)을 이용한 각투(角鬪)를 시열하였으며,166)『태종실록』 권32, 태종 16년 7월 경인. 세종은 목검과 목극(木戟)으로 겨루는 단병접전(短兵接戰)의 교습을 관람하였다.167)『세종실록』 권51, 세종 13년 3월 계유. 이 당시 이첨(李詹)은 경주에서 ‘본국검법(本國 劍法)’의 실연을 직접 보고 이에 대한 자신의 역사적 소견을 피력한 내용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되어 있다.168)『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상도, 경주부. 또한 이 책에는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을 비롯한 많은 문인이 황창랑(黃昌郞)에 관하여 쓴 시문(詩文)이 있어169)『속동문선(續東文選)』 권4, 칠언고시(七言古詩), 「동도악부 칠수(東都樂府七首)」 ; 『열하일기(熱河日記)』 피서록(避暑錄) ; 『점필재집(佔畢齋集)』 시집 권3, 시(詩), 「동도악부(東都樂府)」. 이때만 하여도 신라의 ‘본국검법’이 어떤 형태로든 계승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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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광정연회도(練光亭宴會圖)
연광정연회도(練光亭宴會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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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도검은 환도(環刀)이다. 환도는 군기감 산하의 환도장(環刀匠)이 제작하였는데, 1460년(세조 6)에는 군기감 소속 환도장이 33명으로 증원되고, 다섯 명이 체아직(遞兒職)을 받아 경공장(京工場)의 전속 공장이 되었다. 그러나 1485년(성종 16)에 완성된 『경국대전』에는 인원이 12명으로 감소되어 있고, 소속도 상의원(尙衣院)으로 바뀌었다. 경공장 소속의 환도장이 제조한 환도는 왕족 및 귀족들이 패용(佩用)하기 위한 의장용(儀裝用)으로 복식(服飾)의 일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들 계층을 위한 의장용은 자연히 은세공과 같은 고급화 내지 사치품화되는 경향까지도 나타났다. 조선시대 서울에서 제조된 환도가 양반 귀족들의 의장용이라면, 지방에서 제조된 환도는 병사들의 개인 휴대용 무기였다. 환도는 상공(常貢)의 품목으로도 선정되었기에, 여러 고을에서 일정량을 제조하였던 것이다.

도검류 중에서 검은 의례용의 기능이 컸던 데 비해 도는 군사용의 기능이 컸다. 도가 주로 전투용으로 사용된 데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칼등이 두껍기 때문에 접촉 시에 쉽게 부러지지 않고, 베는데 유리하다. 이것은 검이 양면의 얇은 날로 되어 있어 부딪치면 쉽게 부러지는 것과 비교된다. 둘째로 날을 한 쪽만 만들기에 제조 시간이 짧고, 비용이 저렴한 점이다. 셋째로 전투 기능과 보급에 유리하였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는 군의 주요 전투 장비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특히 문종대에는 환도에 대한 규격을 표준화하는 작업을 시도하였다.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이징옥(李澄玉)이 일선 지휘관으로서 실전에 필요한 도검을 제작하여 공급해 줄 것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그가 제기한 환도의 형태는 모양이 곧고 짧은 것, 즉 ‘직단(直短)’의 형태였다. 이를 계기로 전투용 환도의 규격화가 검토되어 환도의 표준화가 결정되었다. 물론 환도의 규격화를 반대하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일단은 관례와 현실적 요구를 종합하여 표준적인 관례에 따른 규격화가 이루어졌다.170)『문종실록』 권6, 문종 1년 2월 갑오. 도검의 표준화는 대여진전을 통한 기병용의 표준화가 중심이었는데, 이와 함께 보병용도 표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보병용 환도는 길이 1척 7촌 3푼(54.04㎝), 너비 7푼(2.19㎝), 자루 길이 2권(19.42㎝)이었고, 기병용 환도는 길이 1척 6촌(49.98㎝), 너비 7푼(2.19㎝), 자루 길이 1권 3지(15.54㎝)였다.

이후 환도의 규격화가 제대로 실시되었는지의 여부는 의문시되고 있다. 환도를 규격화시킨 지 23년 후인 1474년(성종 5년)에 편찬한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 「병기도설(兵器圖說)」에도 환도의 규격에 대한 일체의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환도의 규격화가 의미를 상실하였다는 뜻일 수도 있다. 환도를 규격화시킨 목적은 편리하게 하기 위함인데, 사람마다 체력의 차이가 있으므로 이를 규격화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효과를 반감시키는 결과가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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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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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대에 환도의 규격을 표준화할 때 실전 경험을 토대로 환도의 형태는 칼날이 곧고 짧은 직단이 큰 고려 요소로 작용하였다. 직단의 형태는 도검류의 초기 형태로 찌르기에 편리한 단검의 기능과 같았다. 이 직단은 위급한 순간에 쓰기 편리한 점을 내세우고 있다. 이 점은 긴 것보다는 짧은 환도를 선호한 것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진상하는 환도의 규격이 점차로 커지는 일반적인 추세를 개선하여 패용 위주의 환도 규격을 요구한 실록 기사는 이를 증명하고 있다.171)『중종실록』 권60, 중종 23년 2월 경신.

결국 조선 전기의 환도는 ‘호신용’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직단의 환도는 전투 무기의 주력이었으며 평상시에는 개인 호신용으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군기감 소장의 도검은 개인 소장의 도검과 구별되었고, 칼날에 ‘군기(軍器)’라는 글자를 새기기도 하였다. 특히 환도의 민간 사용을 제한하기 위해서 환도에 한해 소속 주진(主鎭)의 명칭을 새기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로써 환도는 전투용 무기였지만 개인의 호신 기능을 더 중요시 하였다. 전투용보다는 호신용 기능으로 전환한 까닭은 휴대하기 간편하고 위급할 때 우선 사용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환도의 규격은 자연스럽게 짧아지게 된 것이다.

한편 도검은 화약 병기의 발달과 전술적 활용의 증대로 인해 군사적 기능과 역할이 크게 떨어졌으나 최근접전에서 병사 개인의 호신용으로서의 군사적 기능은 계속 유지되었기 때문에 모든 병사들에게 지급되었다. 총통군(銃筒軍)의 경우에 총통 휴대 외에 개인 호신용 궁시 혹은 도검을 휴대시 켰다. 화기수(火器手)라 할지라도 개인 호신용으로는 도검을 선택적으로 휴대토록 하였던 것이다. 반면 환도를 주무기로 하여 무장된 부대는 전체 병력의 4분의 1 수준으로 추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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