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3장 부국강병의 토대, 조선 전기의 무기와 무예
  • 1. 부국강병의 길
  • 유희적 성격의 무예
박재광

조선 전기의 무예 중에서 유희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무예라면 돌싸움 곧 석전희(石戰戲)를 들 수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고려 말 척석희(擲石戲)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 청심정(淸心亭)에 올라가 구경하였다. 또한 그는 성중의 척석희하는 사람을 모집하여 척석군(擲石軍)이라 명하였는데, 이 척석군을 실전에 직접 투입하기도 하였다. 척석군을 동원해서 침입한 왜구를 배를 타고 쫓아가서 잡게 하기도 하였다. 한편 척석희는 국왕이 즐기는 구경거리도 되었는데, 하루 온종일 벌어진 척석희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태조에 이어 정종도 척석희에 상당한 관심을 나타냈다. 석전희가 일반 서민들의 관심의 대상이 된 시기는 태종대였다. 태종은 석전희 자체를 국가적 차원에서 권장하였지만, 격렬한 향전(鄕戰)의 형태로 거행되던 석전은 금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당대에는 일반 서민들은 물론하고 관리들까지도 석전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심지어 현임 공조 판서인 박자청(朴子靑)과 군기소감 최해산(崔海山)이 별군 30여 명을 인솔하고 석전에 태연히 참가한 일이 발생하자 사헌부에서 이들을 탄핵한 일도 있었다.178)『태종실록』 권25, 태종 13년 5월 계미.

태조의 관심으로 석전대가 성립되었지만 얼마가지 못해서 폐지되고 말았다. 세종이 폐지된 석전대를 부활하면서 자원(自願)을 기본적인 원칙으로 삼았다. 즉 석전 자발대를 조직함에 있어서 공상천례(工商賤隷)에 대해서는 호세(戶稅)를 면제하고 양가의 자제는 서용하라고 하였다.179)『세종실록』 권3, 세종 1년 4월 무자. 석전 자발대에 대한 특례적인 조치를 취하였던 것이다.

또한 1421년(세종 3) 5월에 세종은 상왕인 태종이 병중인데도 불구하고 석전 구경을 희망하자 종루에서 석전희를 행하였다.180)『세종실록』 권12, 세종 3년 5월 계해. 좌편은 방패군 300명이고, 우편은 척석군 150명이 겨루었는데, 번번이 방패군이 척석군을 이기지 못하였다. 돌 대신에 몽둥이를 가지고 서로 치게 하였지만 이때도 방패군은 이기지 못하였다. 다음에는 척석군 40명을 뽑아 방패군을 돕도록 하였지만 방패군은 모두 도망가고 오직 척석군들만 앞장서서 싸웠던 것이다. 당대의 방패군은 가장 건장한 보졸병이었지만 척석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당시 척석희에서는 맞아서 넘어진 사람은 다시 치지 못하도록 해서 가급적 사상자가 발행하지 않도록 하는 규례를 만들었다. 척석군을 좌우대로 나누고, 잘 싸우는 자를 모집하여 이에 충당하였다. 서로의 거리를 200보 이격시켜서 기를 빼앗는 놀이였다. 이긴 편에는 후한 상을 주었다.

태종의 석전에 대한 남다른 관심은 놀이의 차원이 아니라 무예를 연습하는 목적이었으므로 석전놀이를 강조하였던 것이다. 강무의 한 방편이라 하여 국왕이 참석한 가운데 공식으로 성대히 설행한 일이 있었다. 상무 정신 고양책의 하나로 대사례(大射禮)와 더불어 이 석전의 장려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궁중에서 행한 석전은 일반 서민들이 행한 향전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향전에서는 격렬함이 지나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일이 속출하자 의금부에 명하여 이를 금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금령 중에 1438년(세종 20)에 석전희가 재개되었고, 여기에 여러 군(君)과 대군(大君)까지도 구경을 가서 성세를 도와준 까닭으로 싸움이 한층 커졌다. 이로 인해 싸움이 여러 날 계속되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사헌부에서 이를 문제 삼아 여러 종친들을 친국(親鞫)까지 한 일도 있었다.181)『세종실록』 권81, 세종 20년 5월 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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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석전 풍경
평양의 석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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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지(梁誠之, 1414∼1482)는 일반 제도의 수용 원칙에 있어서는 기본적으로 중국 것을 본받자고 하면서도 척석과 연등(燃燈)만은 예외적으로 옛 습속의 계승을 주장하였다. 이와는 달리 병조 판서 한명회(韓明澮, 1415∼1487)는 단오에 행하던 척석희의 격렬함이 상상 외로 많은 피해를 수반하였기에 백성들의 상처를 염려해서 부활에 반대하였다.

석전희는 1438년에 금지된 지 30년 만인 1469년(예종 1)에 복구되었다.182)『예종실록』 권5, 예종 1년 5월 무자. 다시 재연된 이때의 척석희는 순화된 놀이로 전환된 것이 아니라 종전과 같은 내용을 그대로 계승한 격렬한 놀이였다.

향전의 격렬함에 비해 궁중의 석전희는 의례 행사였다. 궁중 석전희는 공격하는 투석군과 방패로 수비하는 양군이 대적해서 돌이나 막대기로 상대를 쳤는데, 억제된 일정한 통제하의 행동 양식으로 피해를 최소화시켰던 것이다. 규제된 놀이에서 용맹심을 발휘하여 상대를 압도함으로써 상대가 도망가게 하거나 상대의 기를 빼앗아 승패를 결정하는 일종의 군사희(軍事戲) 혹은 강무희(講武戲)였다.

1426년(세종 8)과 1427년에는 명나라 사신이 석전희 구경을 요청하자 모화루나 종루(鐘樓)에서 이를 구경시켰다.183)『세종실록』 권36, 세종 9년 5월 경인. 이처럼 중국 사신의 관광 대상이 된 석전희는 제의적(祭儀的)인 측면보다는 일종의 오락으로서의 기능이 강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고려의 풍속대로 석전희를 하다가 점차로 정월 대보름 전후에 석전희를 행하였다.184)강성문, 「조선 석전과 석전대에 관한 연구」, 『한국 군사사의 재조명』, 황금알, 2005, 307쪽. 이 석전희의 원조라 할 수 있는 김해의 석전은 종래의 전통 그대로 매년 4월 초파일에 아동 중심의 석전 연습부터 시작해서 단옷날에 청장년의 석전으로 승부를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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