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3장 부국강병의 토대, 조선 전기의 무기와 무예
  • 1. 부국강병의 길
  • 조선의 장기, 활
  • 조선의 활
박재광

조선 전기의 궁시는 고려시대에 사용하던 제도를 거의 답습하였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에 들어와 각궁(角弓)과 편전(片箭)이 크게 발달하여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궁시로 각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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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활
조선시대 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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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궁은 힘센 활로 맥궁(貊弓)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예로부터 우리나라 고유의 기술로 만들어 탄력의 강함을 외국의 활이 따를 수 없었다. 1488년(성종 19)에 조선에 왔던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이 각궁을 평하기를 “조선이 사용하는 화피궁(樺皮弓)은 중국 제도에 비해서 약간 짧으나 화살이 날아가는 힘은 심히 강하다.”186)동월(董越), 『조선부(朝鮮賦)』.고 하였다. 이 화피궁이 바로 조선의 각궁을 일컫는 것으로 궁력의 강함을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편전은 화살 크기가 작아 일명 ‘애기살’이라고 하는데, 나무로 만든 통아에 편전을 넣고 쏘도록 되어 있었다. 편전은 화살이 작아 가벼운 대신 가속도가 커서 관통력이 컸기 때문에 보 병전은 물론이고 기병전에서도 크게 활용되었다. 또한 편전은 1,000보 이상의 거리까지 날아가 적을 맞혔기 때문에 조선의 가장 중요한 비밀 병기로 활용되었다. 그리하여 세종 때에는 북방의 야인에게 편전 제작 방법이 알려질까 염려하여 함경도 지방에서는 편전 교습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187)『세종실록』 권51, 세종 13년 3월 병자. 그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편전은 조선시대 무관을 선발하는 시험 과목의 하나로 채택되었다. 또한 조선의 편전은 중국의 창, 일본의 조총과 더불어 천하의 제일로 여겨졌다. 이러한 편전을 중국인들은 ‘고려전(高麗箭)’이라고 불렀다.188)강성문, 「조선시대의 편전과 통아」, 『한민족의 군사적 전통』, 봉명, 2000, 283∼284쪽. 그러나 이와 같은 편전의 우수성은 궁시에 대한 지나친 의존과 자만을 불러일으켜 도검, 창 등 다른 무기 개발에 대한 관심을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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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대·완대·동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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