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3장 부국강병의 토대, 조선 전기의 무기와 무예
  • 2. 평화 속에 잠든 무기와 무예
  • 군사 무예로서 개인 무예의 쇠퇴
  • 조선의 방어 전략과 전술
박재광

무기와 무예는 전쟁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유사시를 대비하는 것이다. 조선은 “군대는 백 년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아니할 수 있으나, 단 하루라 할지라도 이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이념을 금과옥조로 여겨 왔기 때문에 조선 전기의 방어 전략과 전술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조선의 방어 전략 수립에는 일차적으로 주변 민족과의 관계를 고려하였다. 북방에는 중국 세력과 만주의 여진 세력이 있으며, 남방에는 왜구가 있었다. 특히 여진과 왜는 문화적으로는 중국이나 조선에 뒤졌지만 군사적인 면에서는 중국이나 조선을 능가하였기에 이들과 평화 관계를 유지하려면 한쪽으로는 국방력을 강화하여 군사적인 우세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할 뿐만 아니라, 다른 한쪽으로는 문화적인 회유와 포섭이 필요하였다. 다시 말해 화전(和戰) 양면, 즉 강온 양면책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조선 전기 방어 전략의 기본 방향은 두만강 유역과 압록강 유역의 영토 개척과 이를 확보하기 위한 진취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만주 일대의 여진이 200여 종족으로 분열된 상태였기에 조선의 군사력으로도 제압이 가능하였다. 따라서 세종대에는 민생 안정을 통한 재정 확보로 사민 정책(徙民政策)과 행성(行城) 축조를 통해서 영토를 개척하였다. 사민 정책은 함길도·평안도 백성은 물론이고 하삼도(下三道, 충청·경상·전라도) 백성들의 입거(入居)로 이루어졌으나, 입보(入保)의 폐단과 빈번한 여진족의 침입으로 도망자가 속출하였다. 또한 여진의 침입에 대한 대비책의 하나로 10여 년간에 걸쳐 20만 명을 동원하여 행성 200㎞를 축조하였다. 그러나 행성 축조에 따른 부담으로 유랑민이 계속 발생하였다.

이후 문종대에는 국내 정세의 불안, 민심의 동요, 경제력의 위축 등에 따라 방위 전략의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서부 몽고 지방의 오이라트(Oirat)가 세력을 확장해 대규모 군사의 침입 가능성이 높아진 현실 속에서 새로운 관방론(關防論)의 수립이 요구되었고, 종래의 행성론은 장성이나 행성을 축조하는 데 막대한 인력이 소요되었으며, 대규모의 적을 방비하는 데도 부적절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새로운 방위 전략은 주·군의 위치에 읍성(邑城)을 쌓아 내지의 요충을 중점적으로 방어하는 체제로 형성되었다.

조선 전기의 전술은 진법, 즉 오위진법이었다. 이 오위진법은 개인의 전투 역량보다는 전투 대형에 의존하였다. 군사들의 무기 체계는 주로 궁시, 화기 등 이른바 ‘장병 전술(長兵戰術)’이었다. 군사들은 궁시와 화기로 무장한 기병과 보병 두 부류로 나뉘어 음양오행에 근거하여 짜인 진법에 따라 대형을 갖추었다.

이후 조선은 대여진전을 통하여 군사 기술과 전술상에서 커다란 발달을 이루었다. 당시에 조선이 보유한 군사 기술 중에서 여진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화포와 편전이었다. 화포와 편전은 다 같이 적을 제압하는 데 쓰는 이기(利器)인데, 편전은 오직 여진이 배워갈까 우려하였으며, 화기는 반대 로 왜인이 배워갈까 염려하였다. 그런데 궁시는 여진의 장기이기도 하였으므로 편전을 쉽게 배워 갈 소지가 충분하였기에 변방 지역에서의 편전 습사를 금지하기도 하였다. 이에 반하여 여진은 화포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실정이었기에 화포가 여진 격퇴에 절대적으로 유효하였다. 편전의 위력은 통아(筒兒)를 통해서 발사되는 관통력에 있었다. 그러므로 관통력의 증진을 위해서 통아가 아니라 화포의 힘으로 발사하게 된다면 유효 사거리와 관통력은 훨씬 높아지기 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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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연사준도(夜宴射樽圖)
야연사준도(夜宴射樽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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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육지에서는 수성용 무기로만 쓰던 화기를 공격용 무기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경량화하여 휴대가 가능하도록 하였다. 또한 여러 발의 화살을 발사하는 다양한 화기를 제조하여 실전에 사용하였다.

이를 통해서 전술상의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다. 예전의 일방적인 방어전에서 공격전으로의 전환은 소부대 전술의 개발로 이어졌다. 소부대 전술은 공격의 기동력을 높이며 산악 전투에 용이하였다. 이 소규모 부대의 기동과 전투에 대한 전술 교범이 바로 세종대에 나온 『진도지법(陣圖之法)』과 『계축진설(癸丑陣說)』이다.

세종대의 전술상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화약 무기의 사용이 종래의 방어용에서 공격용으로 전환되었다. 둘째는 대규모 병력에 의한 평지 전투 대형 훈련 위주에서 소규모 병력에 의한 산악 지형 전투 대형에 대한 훈련이 추가되었다. 이와 함께 세종대는 실전에 대비하기 위해서 무예가 일부 강조된 점은 있지만, 전반적으로 지휘명령 체계가 근간을 이루고 있다.

문종대에 들어서 기본적인 진법서가 된 『오위진법(五衛陣法)』은 국가의 전 병력을 동원하는 대규모 부대의 운영을 위한 이론적인 전술 교범이다. 따라서 병사들의 군사 훈련도 무예를 중심으로 하는 전투 기술 연마보다는 전 부대원의 명령 및 지휘 체제 숙달에 초점을 두고 시행되었다. 따라서 진법의 주 내용도 분수(分數, 편제 및 인원), 형명(形名, 지휘 및 통신), 결진(結陣), 용병(用兵), 군령(軍令) 등으로 이루어져 일개 병사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지휘관을 위한 것이었다. 이 중에서 병사가 실제로 인지해야 할 내용은 군령의 일부에 불과하였다.

특히 조선의 방위 전술론은 공격형이 아니라 방어론 중심이었다. 이 방어론은 기본적으로 성곽을 중심으로 한 전술로 장병 무기인 궁술과 화포술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반면에 공격 전술인 창검술이나 기병 전술에는 취약점을 가지게 되었다. 성곽 중심의 집단적 방어론은 개인 휴대 무기보다 는 공용 무기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러므로 전반적인 조선의 공용 무기 수준은 왜구와 여진에 비해 월등하였지만, 병사가 무장한 개인 무기의 수준은 그들보다 열세였다.

조선은 농업 중심의 사회였으므로 평화 시기에는 무기를 농기구로 전환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고, 무기를 제작할 때도 생활 용구와 겸용으로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은 화약 무기 개발에 국가적 차원의 관심을 쏟았던 데 비하여 일반 무기의 개발은 등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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