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3장 부국강병의 토대, 조선 전기의 무기와 무예
  • 2. 평화 속에 잠든 무기와 무예
  • 민간에서 이어진 무예
  • 석전
박재광

1461년(세조 7) 5월에 좌의정 신숙주(申叔舟)와 홍윤성이 단오에 석전을 금지하라는 건의를 하고 있는 것으로212)홍석모,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1911, 25쪽. 보아 나라에서는 석전을 금지시키려 한 것 같다. 그러나 금지 기사가 자주 되풀이되었다는 것은 법으로 금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행하여졌음을 의미한다.

공식적으로 석전이 다시 시작된 것은 1469년(예종 원년) 5월 단옷날이었다. 단오에 성중의 사람들이 훈련관(訓鍊觀) 사장(射場)에 모여 척석희를 하였다. 사상자가 나올 정도로 양쪽 진의 싸움이 치열하였으며, 사대부가의 여자들도 다투어 석전을 구경하였다고 한다.213)홍석모, 『동국세시기』, 1911, 25쪽. 이 기록에는 “석전은 조선 초기부터 있었는데, 세종이 사람이 다칠까 염려하여 금지하였다. 그러나 이때에 이르러 다시 행하게 되었다.”는 사관(史官)의 글이 덧붙여져 있어 석전이 공식적으로 다시 행해졌음을 알려 준다. 이후 1473년(성종 4)에 선전관(宣傳官) 이윤검(李允儉)을 보내 동대문 밖에서 석전을 금지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214)『세조실록』 권24, 세조 7년 5월 갑진. 이때 다시 돌싸움이 금지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동대문 밖이라는 특정 지역을 거론하였으므로 모든 지역에서 돌싸움을 금지하지는 않은 듯하다.

그런가 하면 1555년(명종 10) 석전군으로 김해 사람 100명을 뽑았다고 되어 있어서 전투 부대로서 석전군도 계속 유지되었던 것 같다.215)『예종실록』 권5, 예종 원년 5월 무자. 전투에서 석전을 활용한 예는 행주대첩에서 찾을 수 있다. “이곳에 돌이 많기 때문에 모든 군사들이 다투어 돌을 던져 싸움을 도왔다.”라고216)『성종실록』 권30, 성종 4년 5월 병신. 하였던 것을 볼 때 전문적인 척석군을 동원하지는 않았지만 돌싸움을 전술로 활용한 것은 분명하다. 조선 후기에 화기가 발달하면서 척석군은 실전에서 점점 효용 가 치를 잃어 갔다.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 “중종조에 왜를 정벌할 때에 석전대를 모집하여 선봉으로 삼으니 적이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임진왜란에 이르러 적이 조총을 사용하게 된 까닭에 힘을 얻지 못하였다.”라고 한 것이 참고가 된다.217)『명종실록』 권18, 명종 10년 5월 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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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은 전투에서 효용성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위험하기 때문에 놀이로서도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였다. 따라서 석전을 금지하려는 움직임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1771년(영조 47)에는 경중에서 단오에 씨름을 벌이는 자와 대보름에 석전하는 자를 처벌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218)『선조실록』 권35, 선조 26년 2월 기유. 그러나 민간에서는 이 금지령이 별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는지 서울의 만리재와 우수재가 석전 장소로 남아 있고, 남대문 밖 굴개, 서대문 밖 녹개천, 동대문 밖 무당개울, 사대문 안의 하남 촌조산 편싸움이 조선 후기에 유명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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