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3장 부국강병의 토대, 조선 전기의 무기와 무예
  • 2. 평화 속에 잠든 무기와 무예
  • 화약 병기의 쇠퇴
  • 모반에 사용될 수 없다
박재광

문종 때까지 세계적인 수준에 있었던 화약 병기는 15세기 후반, 즉 단종 때부터 혼란한 국내 정세의 영향을 받아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화기의 개발에 매우 소극적이었는데, 반대 세력이 화기를 반란에 이용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기의 발달은 현상 유지에 머물면서 오랜 기간 침체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특히 세조대의 소극적 화기 개발은 부대의 편제에도 영향을 주어 총통군이라는 화기 부대마저 해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는데, 이러한 총통군의 해체는 곧 화기의 전술적 운용을 퇴보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겪으면서 일시적으로 바뀌어 화기의 중요성을 새로이 인식하게 되었다. 당시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 완구·화차·화전 등이 투입되어 큰 효과를 보게 되자 새로운 개인 휴대 화기인 신제총통(新製銃筒)이 개발되기도 하였다.

세조에 이어 성종 때에도 북쪽의 야인과 남쪽의 왜구 도발에 맞서기 위해 화기에 대한 관심이 증가되어 육총통(六銃筒)·신제화기(新製火器)·후지화포(厚紙火砲)·주자총통(宙字銃筒)·측자총통(昃字銃筒) 등이 새로 개발되기도 하였다. 중종 때에는 삼포왜란, 야인의 만포진 침범, 사량진왜변 등 야인과 왜구의 침구가 많아져 화기의 이용도가 높아짐에 따라 벽력포 같은 새로운 화기가 개발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세조 이후 중종까지는 국내외 정세의 변화에 따라 몇몇 새로운 화기의 개발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기술적 측면에서는 큰 진전이 없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화약 제조 기술에 대해 보안만 유지한다면 우리나라는 계속해서 주변 적대국에 비하여 무기 체계상의 우위를 유지해 나갈 수 있으리라는 당시 위정자들의 낙관론적인 태도는 이러한 상황을 지속하는 데 한 몫을 하였다. 따라서 화약 제조법에 대한 국가적 통제만이 더욱 강화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우리나라가 정치적 이유로 화기 개발에 소극적 태도를 유지하는 동안에 주변의 여진, 일본 등은 화기 개발에 주력하고 있었다. 특히 유구국(琉球國)은 화기의 기술이 거의 우리나라와 비슷한 수준에 이르렀으며, 일본이나 여진도 화기 제조 기술의 대외 보안 강화에도 불구하고 다른 경로를 통해서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일본은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마침내 화기 기술을 습득하였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도 약 2세기나 늦게 화기 기술을 개발하였으나 이를 급속도로 발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우리나라가 화기 기술의 개량을 자극할 만한 외부로부터의 큰 충격 없이 태평세월을 보내고 있는 동안 그들은 끊임없는 내전을 겪으면서 화기의 제조와 개량에 모두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왜구는 그때부터 화기를 장비한 대선단으로 우리나라를 침범하기 시작하였으며, 그뿐만 아니라 이미 중국에서 새로운 조선술을 배워 우리의 재래식 화포로는 파괴할 수 없는 견고한 배를 만들고 있었다.

1555년(명종 10)의 을묘왜변은 조선의 화기가 왜구의 침입을 저지·격퇴시키기에 한계가 있음을 증명해 준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 5월 11일에 70여 척의 선단을 이끌고 전라도 영암군 달양포에 침입한 왜구는 견고한 대형 선박과 철환 화포(鐵丸火砲, 화살이 아니라 탄환을 발사하는 화기)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존 화력으로는 제압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개량해 온 대형 화포를 바탕으로 왜구를 제압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명종 때에는 다양한 화기 개발과 함께 대형 총통의 제작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을묘왜변 이후 태평세월이 한동안 이어져 을묘왜변을 계기로 제고되었던 군비 강화에 대한 인식마저도 날로 쇠퇴하여 국방 체제는 다시 해이해졌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가 16세기 후반에 남쪽의 왜구 침범과 북쪽 여진의 위협으로 새로운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른바 니탕개(尼蕩介)의 난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약 10년 전인 1583년(선조 16) 2월에 일어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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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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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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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조선에서는 새로운 소형 화기가 개발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승자총통(勝字銃筒)이다. 따라서 조선군은 온성부사(穩城府使) 신립(申砬, 1546∼1592)의 분전과 승자총통이라는 휴대용 화기의 위력에 힘입어 적을 토벌할 수 있었다. 승자총통은 선조 때에 전라·경상 병사를 지낸 김지(金墀)가 개발하였는데,220)『영조실록』 권117, 영조 47년 11월 갑인. 한 번에 철환 15개와 피령목전(皮翎木箭)을 발사하며 사거리가 600보에 달하였다고 한다. 정확한 개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기록에는 1583년에 처음 보이며, 실물 유물 중에서 가장 빠른 것은 1573년(선조 6)에 제작된 것이기 때문에 적어도 1577년(선조 10) 이전에 이미 개발된 듯하다. 승자총통은 니탕개의 난 토벌뿐만 아니라 1588년(선조 21) 여진 정벌 당시 큰 효과를 보았다는 기록이 실록에 여러 차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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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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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사용한 소형 화기는 대부분 승자총통 종류들이다. 승자총통은 다시 승자총통, 차승자총통, 소승자총통, 중승자총통, 대승자총통, 별승자총통 등으로 나뉜다. 이들 각종 승자총통은 대량으로 사용된 탓인지, 실물 유물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 현재 국내에 70여 자루가 전해 오고 있고, 일본에도 10여 자루 이상이 있다.

특히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쓴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보면 1592년 6월 2일의 해전에서 대승자총통과 중승자총통을 사용하였다고 나온다. 또한 전남 여천시 백도 앞바다에서 승자총통, 차승자총통, 소승자총통, 별승자총통 등이 다량으로 인양되었다. 이런 여러 자료를 보면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들이 승자총통 계열의 총통을 많이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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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승자총통
별승자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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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승자총통
소승자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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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총통은 어떤 장점을 가진 무기였기에 이토록 많이 사용된 것일까?

조선 중기의 승자총통과 조선 전기의 소형 총통의 결정적인 차이는 겉모양이 아니라 내부 구조에 있다. 조선 초기의 소형 화기는 기본적으로 격목형 총통인데 반해, 승자총통은 격목을 사용하지 않는 순수한 토격형(土隔型) 총통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이후 조선 중기에 등장한 소형 화기는 화살을 발사할 때는 격목을 사용하고, 철환을 발사할 때는 토격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승자총통은 격목을 사용하지 않고, 토격(흙)만 사용하도록 특수 설계한 순수한 토격형 화기(총통)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승자총통은 화살보다는 철환(3∼15개)을 주로 사용하는 최초의 총통이었고, 그것이 승자총통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자 장점이었던 것이다. 소형 화기의 경우 화살보다는 철환을 쏘는 것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소승자총통은 조총과 같은 신식 총과 유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총신에 가늠자와 가늠쇠가 있고, 다른 화기와 달리 총가(銃架, 개머리판)가 달려 있어 눈 옆에 총통을 붙이고 가늠쇠와 가늠자를 이용한 조준 사격이 가능하였다.

이처럼 승자총통과 소승자총통은 조선의 소형 화기 중에서는 가장 진화된 무기였기 때문에 화기를 보유하지 못한 야인들의 격퇴에는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지화식점화법(持火式點火法, 화약심지에 직접 불을 붙이는 방식)으로 사격해야 하고, 또 주철로 주조하였기 때문에 사격 간에 총열이 자주 파열되는 결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승자총통을 과신하게 되고, 이 같은 자만은 여진은 물론 일본이 침입해 오더라도 이러한 무기 체계를 갖추고 있는 한 이들을 능히 격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론에 빠지게 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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