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4장 부흥의 초석, 조선 후기의 무예와 무기
  • 1. 단병기와 단병 전술의 교훈
  • 실전 무예와 무기를 개발하라
장필기

임진왜란을 통하여 얻은 조선의 무예와 무기에 대한 인식은 단병 전술을 통한 단병기의 개발이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하여도 병사들의 개인적인 무예보다는 진법 훈련을 통한 병사들의 전투력을 우선하였다. 군대를 조련하고 무예를 사열할 때도 오직 기치를 휘날려 사람들의 이목을 현란하게 하는 정도일 뿐 공격과 방어법은 유념하지 않았다. 따라서 무과 시험에서도 마상에서 창을 쓰는 한 가지 기예뿐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계기로 진법 훈련에 앞서 개인의 무예를 중시하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다양한 단병기 훈련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253)강성문, 앞의 글.

임진왜란 직전 시기에 조선은 단병기인 창검술에 대한 훈련이 전무한 상태였다. 이러한 사정을 『무예제보』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바다 밖에 치우쳐 있어서 예로부터 전해 오는 것은 단지 궁시 한 가지 기예가 있을 뿐이다. 검과 창에 이르러서는 한갓 그 무기가 있을 뿐, 이를 돌보아 익히고 쓰는 법이 없었다. 마상에서 창을 쓰는 한 가지 기예가 비록 무과 시험에 채용되었을 뿐이나 사용법 역시 자세히 갖추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검과 창은 무기 자체가 폐기된 지 오래이다. 따라서 왜병과 대진하여 왜병이 문득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해 오면 아군은 비록 창을 잡고 칼을 차고 있을지라도 칼을 칼집에서 뺄 틈이 없고, 창은 맞부딪쳐 보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모두 적의 흉악한 칼날에 죽음을 당하고 만다. 이러한 까닭은 전혀 검법과 창법을 익히는 무예의 법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254)『무예제보(武藝諸譜)』, 무예교전법(武藝交戰法).

이러한 정황은 당시 조선이 지니고 있는 일반적인 무기와 무예에 대한 인식 수준이었다. 따라서 왜병과 백병전이 벌어지면 손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당하기만 하였다.

왜병은 먼저 조총으로 선제공격을 가한 후에 왜검을 들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돌격 자세로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경험에 비추어 조선은 임진왜란 중에 명나라 군대의 단병술과 왜군의 왜검술을 수용하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지속되지 못하였다. 그 결과는 병자호란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었다. 청나라 군대의 대규모 기병 중심의 기동전에 맞선 조선의 소규모 살수 부대의 작전은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다. 병자호란을 통해서 조선은 국가 전략뿐만 아니라 전술 및 무기 체제에서도 그동안 업신여기던 야인에게조차 열세인 것이 입증되었다.

인조반정은 군사권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하게 하였고, 아울러 한때 주춤하였던 무기와 무예 개발에 대한 노력이 다시 나타났다. 인조는 단병 기예의 훈련을 어영청(御營廳) 등에도 확대하도록 훈련도감 교사들의 차출을 권장하였다.255)『인조실록』 권17, 인조 5년 11월 신묘.

효종은 북벌(北伐)을 준비하면서 그동안 등한시해 왔던 활과 화살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였다. 신식 무기인 화포에 대한 관심 못지않게 재래 무기에 대한 상호 보완적인 기능을 중시한 것이다. 이는 청나라의 무기가 재래식이고, 전장이 만주 평야 지대인 점을 감안한 조치였다. 더불어 보병은 장병검, 기병은 단병검으로 대체하여 청나라의 도검류에 대적하도록 하였다. 또한 사법(射法)과 검법 개선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를 테면 적군과 접전할 때 칼이 손에서 떨어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칼의 손잡이에 줄을 매달도록 하는 방법 등이었다.

당시 조선의 화포 부대는 최강의 전력이었지만, 화포의 취약점은 폭풍우가 칠 때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개선책으로 수어청(守禦廳)의 화포수와 사수를 반반으로 혼합 편성한 전천후의 사포 참반대(射砲參半隊)를 재편성하였다.256)강성문, 앞의 글.

효종은 북벌전이 만주 평원전이 될 것을 예상하여 그 대비책으로 금군을 친위 기병대로 개편하고, 창덕궁에 전용 기사장(騎射場)을 마련하여 위사(衛士)들에게 말타기와 활쏘기 등의 무예를 연마시켰다. 이때 취한 무기 체계는 화포, 궁시, 기사 등 장병기 중심257)강성문, 앞의 글.으로서 이후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단병기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어나게 된 것은 1759년(영조 35)에 사도 세자가 『무예신보(武藝新譜)』를 간행하면서부터이다. 『무예신보』는 단병기 무예서인 『무예제보』를 보완한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단병기 무예에 대한 관심이 지속되지 못한 까닭은 전통적인 궁술이 차지하는 비중에 비하여 단병기에 대한 선호도가 낮았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대내외적인 환경의 변화로 사실상 군비 확장이 현실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영조 때의 단병기에 대한 관심은 도성 사수론(都城死守論)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영조는 도성 사수를 천명하고 이를 위한 군비 개선으로 무기 체계를 정리하였다. 이에 따라 도성 사수론에서 제기된 근접전을 상정하였 다. 그러나 당시의 전술 수준에서 볼 때 도성 사수는 문제점이 많았다. 이를 간파한 정조는 실제적인 도성 방위를 구상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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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전도(華城全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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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요새화된 군사 도시인 화성(華城) 건설과 장용영(壯勇營)을 통한 수성을 구상하는 한편, 국왕 호위를 위해서는 화약 병기뿐만 아니라 단병기 무예가 필요함을 절감하고 있었다. 정조는 정기적으로 대열(大閱) 등을 통하여 이를 시험하거나 장려하는 실전 무기 개발과 무예 장려책을 펼쳤다. 1790년(정조 14)에 발간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가 이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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