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4장 부흥의 초석, 조선 후기의 무예와 무기
  • 2. 우리 무기는 우리식에 맞게
  • 잠자던 무기의 부활
  • 18∼19세기의 무기 개발
장필기

18세기에 들어와서 사거리 1,000보가 넘는 총이 제작되었다. 그전까지 고작 100보를 넘지 못하던 수준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이었다.

1725년(영조 1) 군기시에서 제의하기를 “무기로는 포나 총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군사들이 쓰고 있는 총은 성능이 100보를 넘지 못합니다. 숙종 때 박영준(朴英俊)이라는 사람이 천보총(千步銃)을 만들어 바쳤다고 하였기 때문에 박영준의 아들 박지번(朴枝蕃)을 시켜 총 두 자루를 시험 삼아 만들게 하였더니 지금 쓰고 있는 총보다 조금 길고 약간 무거우나 그 성능은 사정거리가 거의 900여 보에 이르러 그야말로 이전에 보지 못한 무기입니 다.”290)『영조실록』 권8, 영조 1년 12월 기축.고 하였다. 또 윤필은(尹弼殷)이 만든 천보총은 몸체가 작으면서도 매우 가볍고, 모양은 하나의 쇠 지팡이처럼 생겼는데 성을 순찰할 때 쏘아 보니 1,000보나 날아갔다고 하였다.291)『영조실록』 권24, 영조 5년 9월 계미.

이처럼 박영준이 그전보다 총신을 늘여 사거리를 크게 하였고, 윤필은 이 무게를 줄여 경량화함으로써 천보총의 성능을 발전시켰다.

1731년(영조 7)에 훈련도감에서 “새로 동포(銅砲) 50문과 홍이포(紅夷砲) 2문을 갖추어 52폭(輻)의 수레에다 실었습니다. 동포의 사정거리는 2,000여 보나 되고 홍이포의 사정거리는 10여 리나 되니 이것은 실로 유사시에 쓸 만한 것입니다. 홍이포는 우리나라에서 새로 만들어 바친 것입니다.”292)『영조실록』 권30, 영조 7년 9월 신사.라고 하여 홍이포 개발에 대한 사실을 얘기하고 있다.

‘홍이’는 화란(和蘭, 네덜란드)을 가리키며 홍이포는 화란에서 전해진 화포 또는 그와 같은 유형의 화포를 말한다.

이익(李瀷, 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의하면 홍이포가 임진왜란 당시에 처음 들어왔는데 유선형 탄환을 사용하였다고 한다.293)이익(李瀷), 『성호사설(星湖僿說)』 권4, 만물문(萬物門). 탄 안에는 화약이 재어져 있고 머리부에 심지 구멍이 있다. 탄 한 발에 염초 710g, 유황 113g, 삼을 태운 재 225g, 납 38g, 철 76g, 금박과 은박 각각 5단을 섞어서 만든 화약을 사용하였다. 탄이 땅에 떨어지면 수십, 수만 갈래의 불길이 일어나면서 성곽과 마을을 불사른다고 하였다.

홍이포는 50문의 동포와 2문의 홍이포를 각각 수레에 실어 기동성 있게 이동 발사할 수 있었다. 또 탄 안에 화약을 장전하여 발사하므로 폭발 위력을 높일 수 있었다.

1770년(영조 46)경에 나온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의 『고사신서(攷事新書)』에 전차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것은 소나무 판자로 만드는데 모양은 궤짝과 같다고 하였다. 전차가 갈 때에는 칼이 밖으로 나오고 멎으면 안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이 전차 안에서 일와봉총(一窩蜂銃)을 쏘게 되어 있는데 발사 후에 총을 뽑으면 덮개가 저절로 닫혀 적의 탄환이 안에 들어올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또 세 바퀴가 달려 있어서 행군할 때에는 대열의 앞에 세우고 적을 만나면 전진하면서 발사하므로 적을 막으면서도 군대 행렬을 정연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또 포신에 일정한 사각을 부여하여 편리하게 하였다.294)서명응(徐命膺), 『고사신서(攷事新書)』 권9, 무비문(武備門) 전차제(戰車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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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측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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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기요람(萬機要覽)』에 의하면 훈련도감에 121대, 금위영에 56대, 어영청에 10대의 화차가 있었고, 어영청에는 전차도 51대가 있었다.295)『만기요람(萬機要覽)』, 군정편(軍政編) 2·3.

19세기 무기 제조 기술의 발전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수뢰포(水雷砲)이다. “어제 수뢰포를 시험 발사하였는데 큰 배도 능히 격파하였으니 이제는 외래 침략자들을 근심할 것이 있겠는가.”296)『고종실록』 권4, 고종 4년 9월 11일조.라고 자신한 것처럼 수뢰포의 위력은 대단하였던 모양이다.

수뢰포는 고종 때 훈련대장이었던 신헌(申櫶, 1810∼1884)이 『해국도지(海國圖誌)』에 기초하여 제작하였다고 한다.297)『고종실록』 권4, 고종 4년 9월 11일조. 수뢰포가 터지면 폭음이 우레와 같이 진동하며 아무리 견고한 물체라도 모조리 부수어 날려 보낸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이 무기의 전투적 이용 가치가 아주 컸던 것 같다. 수뢰포는 한때 원산과 인천 앞바다에 설치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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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뢰포 단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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