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4장 부흥의 초석, 조선 후기의 무예와 무기
  • 2. 우리 무기는 우리식에 맞게
  • 장·단병기의 조화를 위하여
장필기

17세기 이후 조선이 개발한 무기는 화포를 중심으로 하는 장병기 위주의 화약 병기였다. 당시 화약 병기는 군사 무기로서 최상의 군기(軍器)로 인식되었다. 전술상에서도 이를 중심으로 하는 편성과 훈련이 주를 이루었다.303)강성문, 앞의 글. 이러한 것은 순조가 “우리나라의 군기 가운데 궁시(弓矢)·간척(干戚)·창검(槍劍)·총포(銃砲) 중 어느 것이 가장 긴요한 것인가?”라고 묻자, 당시 비변사 유사 당상인 서영보(徐榮輔)는 “총포가 최우선입니다.”라고 대답하였고,304)『순조실록』 권11, 순조 8년 8월 갑오. 승지 이광익(李光益)도 “왜국에서는 오로지 총포만을 숭상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임진왜란 후로 이 법을 갖추게 되었다.”고305)『순조실록』 권11, 순조 8년 8월 갑오. 하는 등의 사례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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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곤
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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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17세기의 군사 무기는 장병기 중심으로 발달하였지만, 전투의 승패는 근접전의 결과로 결정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 근접전의 주무기가 다양한 재래 무기였다. 더불어 근접전을 위해서는 다양한 단병기의 동원이 필요하였다.306)강성문, 앞의 글.

18세기에 들어서면서 홍이포와 같은 대형 화포가 개발되었다. 이들 화포는 사격의 정확성이 뛰어나서 밀집 대형의 보병을 근간으로 하는 『기효신서』의 방진 전술에는 특효였다. 조선 후기 정예 부대라고 할 수 있는 용호영 등은 기본적으로 기병을 주력으로 삼고 있었다. 기병은 보병과 달리 기동성이 뛰어났다. 이에 따라 경무장 기병의 역할이 한층 중요하였다.307)강성문, 앞의 글.

대개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대왜전(對倭戰)에서는 『기효신서』의 ‘포살법(砲殺法)’을 썼고, 대호전(對胡戰)에서는 『연병실기(練兵實紀)』의 ‘거기보법(車騎步法)’을 썼다. 보기(步騎)·거전(車戰)의 복합 전술에서 기병의 역할 은 속도전이었다. 기병 중심의 용호영에서는 기병이 전통적인 조총이나 창을 휴대하지 않았다. 크고 긴 장창 대신에 편곤(鞭棍)과 같이 아주 휴대하기 쉽고 빠르게 휘두를 수 있는 무기로 무장하였다. 이는 기병의 경량화로 기동력에서 창보다는 편곤이 오히려 더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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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곤을 든 기병
편곤을 든 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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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호영의 작전은 적병이 100보 안으로 들어오면 궁시를 일제히 발사하고, 적병이 50보 내에 들어오면 편곤을 뽑아들고 함성을 지르며 적을 추격하는 것이었다. 편곤은 농기구인 도리깨와 비슷하다. 쇠사슬을 협방(挾棒) 위에다 매달아서 좌우로 휘두르면 위력이 대단하였다. 이와 같은 경기병(輕騎兵)의 효용성은 무기 체계상에 변화를 가져왔고, 이에 대항하는 보병의 무기 체계에도 변화를 초래하였다. 보병은 대기병전과 대보병전을 위해 총구에 착검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이 장치로 근접전에서 장창과 도검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함으로써 장창 단독의 병종은 전투 무대에서 사라졌다. 전장에서 장창수가 조총수의 한 병종으로 합쳐지면서 보병 전술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308)강성문, 앞의 글.

이러한 병기의 발전과 전술의 변화는 18세기 이후 보편적 군사 훈련의 시행을 위한 무예서의 규범화를 강조하게 되었다. 곧 무예서의 편찬과 무예서를 통한 장·단병기 전반에 걸친 무예 습득은 군사력 강화를 위한 또 하나의 과제이기도 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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