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4장 부흥의 초석, 조선 후기의 무예와 무기
  • 3. 표준 무예의 보급
  • 무예서의 편찬과 보급
  • 『무예제보』
장필기

『무예제보』는 1598년(선조 31)에 훈련도감 낭관인 한교가 『기효신서』를 참고하고, 명나라 장수 허국위(許國威)에게 지도받은 곤방·등패·낭선·장창·쌍수도·당파 등 6기의 도보(圖譜)를 언해(諺解)와 함께 수록하여 무인이나 일반 대중의 이해를 돕고자 펴낸 무예 실기서이다.

『무예제보』의 편찬은 임진왜란 당시 초전에 조선군이 왜군에게 크게 패퇴하자 대응책으로 1594년(선조 27) 2월 선조가 훈련도감에 특명으로 『살수제보(殺手諸譜)』를 번역하도록 지시한 데에서 출발하였다.

이 초고본(草稿本)은 살수 가운데 곤보(棍譜), 패보(牌譜), 선보(筅譜), 장창보(長槍譜), 파보(鈀譜), 검보(劍譜)의 여섯 가지 무예로 이루어졌다. 이 기예는 척계광이 발전시킨 원앙진(鴛鴦陣)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원앙진은 왜군의 장사진(長蛇陣)과 호접진(蝴蝶陣)에 대비하기 위하여 대장, 등패수, 낭선수, 장창수, 당파수, 화병 등을 전투의 기본 단위로 삼고 상황에 따라 협동이 가능하도록 한 단병 전술이었다.

이 내용을 보면 『무예제보』는 원앙진에 사용되는 등패, 낭선, 당파, 장창에다 곤방과 쌍수도가 추가되는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초고본에는 장창세가 일부 누락되었고 각 기예의 세법에 대한 의문이 해소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실제로 초고본은 장창 24세 가운데 12세밖에 실리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장창 12세가 빠진 까닭은 명나라 장수들이 24세 중 12세만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장창세의 보완은 『무예제보』를 완성하는데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였다.

갑오년(1594)의 『무예제보』에 12세의 장창보를 ‘장창전보(長槍前譜)’라고 이름하고, 을미년(1595)에 추가된 12세의 장창보를 ‘장창후보(長槍後譜)’라고 하는 새로운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이로써 『무예제보』의 창세가 비로소 완비되어 무예 6기의 편찬 체제가 마무리되었다.

1598년(선조 31)에 펴낸 『무예제보』는 비록 무예 6기의 형식은 갖추었지만, 기법에 대한 이해를 얻지 못해 무예를 연마할 때나 시취(試取)할 때 혼란이 계속되었다. 또한 무예서의 미비는 일부 단병 무예만을 익히는 불균형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그 원인은 조선군 자체에도 있었지만, 이를 가르쳐 온 중국의 교습 방식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한교로 하여금 훈련도감의 살수 가운데 정예병 12명을 교사대(敎師隊)로 뽑아 명나라 장수 허국위에게 기예를 익히게 하였다.

한교는 허국위를 통하여 『기효신서』에 기록된 창세(槍勢)에 대한 의문 을 풀고, 이어서 격자술(擊刺術)에서 음양수(陰陽手)와 대소문(大小文)의 뜻을 바르게 이해한 다음 다시 편차를 세워 번역하였다. 이러한 조치로 보아 을미년에 추가된 장창보가 바로 무술년에 또 한 차례 새로 번역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무예제보』는 갑오년과 을미년에 이어 무술년인 1598년(선조 31) 10월에 최종 완성되었던 것이다.

한교는 허국위와의 문답을 「기예질의(技藝質疑)」에 싣고, 『주해중편(籌海重編)』에 기록된 각 기예의 대착법(對戳法)을 권말에 붙였다. 「기예질의」의 핵심은 무예의 동작과 기술에 대한 정확한 개념과 이해를 통하여 화법(花法)을 버리고 정법(正法)을 판별하여 무예교습의 기법을 바르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1594년(선조 27)에 편찬하기 시작한 『무예제보』는 세 차례의 편찬 과정을 거쳐 5년 만에 최종 완성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기효신서』에 소개된 권법(拳法)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무예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더욱이 전란 이후 조선의 국방 인식은 새롭게 남왜북적(南倭北狄)에 대한 방비를 동시에 고려하는 전술 체계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1610년(광해군 2)에는 『무예제보』에서 누락된 대권(大拳), 언월도(偃月刀), 협도곤(俠刀棍, 鉤槍), 왜검 등 네 가지 무예를 새로 보완하여 『무예제보번역속집(武藝諸譜飜譯續集)』을 편찬하였다.

당시 『무예제보』는 살수를 교련하기 위한 조련서였으나, 실제로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1629년(인조 7)에 『무예제보』 한 부를 찾아 어람용(御覽用) 세 권과 교습용 100여 권을 인쇄하여 중외(中外)에 전습하였다. 그러나 숙종대 중반에 이르러 군영에서 『무예제보』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그러다가 우연히 강원도 금화현에서 『무예제보』를 찾아내어 훈련도감에서 새로 중간(重刊)하였다. 그러한 연유는 후일 노론의 영수였던 이이명(李頤命, 1658∼1722)의 발문에 잘 나타나 있다.

『무예제보』의 중간은 그동안 부실해진 살수 무예의 교련 체계를 바로잡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714년(숙종 40)에는 훈련대장 이기하(李基夏)가 이를 주장함으로써, 『무예제보』는 다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또한 중간본은 훈련도감을 비롯한 중앙 군영의 살수 무예서로 자리를 잡아 하나의 규범이 되었다.

숙종대에 중간된 『무예제보』가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무엇보다 영조대에 사도 세자가 『무기신식(武技新式)』, 즉 『무예신보(武藝新譜)』를 편찬하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영조대까지 남아 있던 『무예제보』 중에는 적지 않은 오류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한 사실은 1759년(영조 35)에 『무예신보』를 편찬하는 과정에 종래 무예 6기의 연습 규정이 대부분 잘못되었으므로 옛 책을 가지고 모두 고증하여 바로잡았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311)『정조실록』 권28, 정조 13년 10월 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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