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4장 부흥의 초석, 조선 후기의 무예와 무기
  • 3. 표준 무예의 보급
  • 무예서의 편찬과 보급
  • 『무예도보통지』
장필기

『무예도보통지』는 잘 알려진 대로 한교의 『무예제보』와 사도 세자의 『무예신보』를 잇는 무예서이다. 정조는 특히 『무예도보통지』가 사도 세자의 뜻을 계승한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무예신보』의 편찬은 사도 세자의 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사도 세자는 대리청정을 통하여 그의 지지 기반인 노·소론 내의 청 류당(淸流黨)과 남인(南人)을 중심으로 신진 무반을 양성하는 등 인재를 육성하려 하였다. 이를 위하여 무예서를 편찬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당시 정국을 주도하고 있던 노론 집권파와 척족 세력들에게는 늘 위협의 요소가 되었고, 더불어 영조도 그러한 사도 세자의 움직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1755년(영조 31) 윤지(尹志)의 나주 괘서 사건(羅州掛書事件)으로 발단된 을해옥사(乙亥獄事)가 발생하였을 때 이 사건에 조동하(趙東夏), 조동정(趙東鼎), 박찬신(朴纘新) 등이 연루되었다.312)『영조실록』 권84, 영조 31년 4월 정미. 조동하 등은 바로 사도 세자가 신진 무인으로 양성하기 위해 발탁한 인재들로서, 결국 그 여파는 사도 세자의 운신의 폭을 더욱 움츠려 들게 하였고 끝내는 임오화변(壬午禍變)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대개 인조반정 이후 군사권에 대한 재인식과 함께 벌열(閥閱) 가문 중에서도 중앙 군영 대장 등을 배출한 주요 가문을 중심으로 무반 가문이 형성되었고, 그들은 이미 오랫동안 왕실 및 주요 정치 세력과 연결되면서 무반 내에서 벌족을 형성하였다.313)장필기, 『조선 후기 무반 벌족 가문 연구』, 집문당, 2004. 이에 대하여 사도 세자는 기존 정치에 물들지 아니한 신진 무인을 발탁하여 양성하고, 이들의 훈련을 위한 무예서 편찬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영조와 갈등이 깊어 가는 속에서 사도 세자의 그러한 움직임은 영조와 반대파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무예신보』는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편찬되었다.

사도 세자는 처음에 『무예제보』의 6기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였으나, 18기 기예에 익숙한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18기 무예를 담은 『무예신보』를 편찬하게 되었다. 사도 세자는 목적에 부합되는 병기와 무예를 적절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단병기는 공격용, 장병기는 수성용이라는 『주례(周禮)』의 기록을 인용하였다. 특히 예도(銳刀), 월도(月刀), 협도(挾刀)의 세 도검류와 교전(交戰), 권법, 편곤 등의 여섯 가지 단병기를 강조하고, 『무예신보』 편찬 이전부터 이들 기예를 전 만호(萬戶) 임수웅(林秀雄) 등에 게 교육시켰다.314)『일성록』 정조 20년 3월 22일. 『무예도보통지』는 『무예신보』의 단병기를 그대로 유지하고 마상 기예를 덧붙인 형태로 편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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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도보통지』의 서문
『무예도보통지』의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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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도보통지』가 사도 세자의 뜻을 계승한 것이라는 정조의 말은 단순히 책의 편차나 단병기가 중심이 되는 무예의 내용만을 이어받았다기보다는 무예서 편찬 의도를 계승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정조는 『무예신보』를 편찬한 사도 세자의 뜻이 멀리 효종의 북벌 대의(北伐大義)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편찬된 사도 세자의 지문(誌文)에도 그의 무인적 기질과 무예 능력, 심지어 용모까지 효종과 닮았다는 평가가 실려 있다. 그러나 정조가 계승하려던 사도 세자의 뜻은 새로운 무반층의 육성과 표준 무예 체계의 확립이었다. 실제 정조는 장용영(壯勇營)을 통해 이를 실험해 나갔다.315)배우성, 「정조의 군사 정책과 『무예도보통지』 편찬의 배경」, 『진단학보』 91, 진단학회, 2001.

장용영의 기예는 크게 마군(馬軍) 원기(元技)·별기(別技), 보군(步軍) 원기·별기로 구분되는데, 『무예도보통지』의 24반 무예는 마군과 보군의 별기에 해당한다. 마군 별기는 마재(馬才)와 나머지 기예로 구분되었다. 무예의 이러한 구분법은 시취 과정과 장용위 임용 과정에서도 일관되게 적용되었다. 정조가 장용영을 통해 『무예도보통지』의 24반 무예를 확립하여 보급하려 했음은 장용영 장관과 장교의 충원 방식이나 장교층에 대한 24반 무예의 강조 등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316)배우성, 앞의 글.

『무예도보통지』는 장교뿐만 아니라 군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통달할 수 있도록 가능하면 간편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이덕무(李德懋)와 박제가(朴齊家)는 「병기총서(兵技總敍)」에서 “『무예도보통지』를 찬술한 뜻이 이미 만세 태평한 시대를 맞이하여 앞으로도 계속 태평성대를 이루려는 정조의 뜻에 부합되기 위함이었다.”317)『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병기총서(兵技總敍).고 하였다. 『무예도보통지』 편찬을 실무적으로 주도하였던 이들은 정조의 무(武)와 관련된 여러 정책이 이러한 당대의 학문적 분위기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318)배우성, 앞의 글.

이 같이 『무예도보통지』는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 등이 24반 무예를 일일이 교정하고 직접 장용영의 무사들에게 시험하면서 정리하는 한편, 군영마다 차이가 있는 부분을 표로 만들어 무예의 통일을 기하고자 한 조선 후기 무예서의 집대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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