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4장 부흥의 초석, 조선 후기의 무예와 무기
  • 3. 표준 무예의 보급
  • 창, 칼, 주먹, 기예
  • 주먹(拳) 그리고 기예
장필기

『무예도보통지』에서 권법으로 시작하는 때리기 위주의 무예에는 권법, 곤방, 편곤, 마상편곤과 말을 타고 하는 격구와 마상재가 있다.

권법은 무기 없이 하는 도수(徒手, 맨손) 무예로서 『기효신서』에서는 “수족을 움직이게 하고 지체를 단련시키게 하는 초보자들이 무예에 들어가 는 문”347)『기효신서』 권5, 권법해(拳法解)이라고 하였다. 권법은 송 태조 장권 32세를 기본으로 하는 무예로서 손·어깨·무릎을 사용하는 도수 무예이다. 명나라군에게서 도입할 당시에 고려나 조선 초기 수박(手搏)과의 연관성을 언급치 않았다는 점에서 권법을 수박과 전혀 관련이 없는 외래 무예로 인식하고 있었다.348)나영일, 앞의 글.

『무예제보번역속집』의 「권보」는 『무예도보통지』의 권법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즉, 『기효신서』의 권법은 32세인데, 『무예제보번역속집』의 「권보」는 42세이다. 또한 「권보」와 『무예도보통지』의 「권법보」는 『무비지』나 『기효신서』의 내용과 다른 부분이 있다. 『무예도보통지』의 「권법총도」에는 모두 44개 세의 그림과 마지막 동작 그림이 나오지만, 『무예제보번역속집』의 「권보」와 달리 일곱 번이나 중복되던 요단편세(拗單鞭勢, 채찍을 휘두르는 자세로 잇따라 팔과 다리를 교차시키는 보법)는 두 번만 중복되고, 현각허이세(懸脚虛餌勢, 다리를 걸어 먹이를 놓치게 하는 자세)는 네 번 중복되는 등 차이가 많다. 그리고 본문에는 모두 28개 그림 동작이 나오는데, 18가지의 그림 동작은 다른 책에는 나오지 않는 오화전신세(五花纏身勢, 오색 줄로 몸을 묶는 자세)라는 동작까지 개인이 혼자서 연습하는 것으로 꾸며졌고, 오화전신세 이후부터는 갑과 을 두 사람이 함께 겨루기를 하는 10장면으로 만들어졌다. 이를 보면 「권보」와 「권법보」는 단순히 『기효신서』나 『무비지』의 내용을 싣기보다는 배우는 사람의 입장에서 새롭게 변형시킨 것임을 알 수 있다.349)나영일, 앞의 글.

확대보기
현각허이세(懸脚虛餌勢)
현각허이세(懸脚虛餌勢)
팝업창 닫기

곤방은 긴 막대기를 주로 휘둘러서 때리고 찌르며, 때리거나 찌르는 상대의 곤방을 방어하는 일 종의 교전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곤방은 여섯 가지가 있는데 모두 단단하고 무거운 나무로 만든다고 하였다. 길이는 네다섯 자이고, 윗부분을 쇠로 감싼 것을 가려방(訶藜棒), 머리 부분에 날카로운 칼날을 붙이고 아래에 쌍 갈고리를 거꾸로 매단 것을 구방(鉤棒), 날이 없이 우둘투둘한 쇠로서 갈고리를 한 것을 소자방(抓子棒), 이리 이빨처럼 위에 곧은 침을 단 것을 낭아방(狼牙棒), 이리 이빨같이 처음부터 끝까지 고르게 굵은 것을 저방(杵棒), 보리타작하는 도리깨 같은 것을 철련협방(鐵鏈夾棒)이라 한다.350)『무예도보통지』 권4, 곤방. 사람들은 대부분 곤방을 무예의 으뜸이라고 하였다. 모원의는 모든 무예의 기본기로서 곤방을 들고 곤방의 으뜸을 소림곤법(小林棍法)이라고 하였다. 곤에는 대곤, 중곤, 소곤이 있다.351)『훈국총요(訓局總要)』, 곤식(棍式).

확대보기
곤방보
곤방보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편곤보
편곤보
팝업창 닫기

편곤은 곤의 끝에다 쇠줄을 연결하여 단단한 2자 2치 5푼 크기의 자편(子鞭)을 연결한 쇠도리깨 모양의 무기이다. 속칭 철연가(鐵連耞)라고 한다. 연가는 벼를 타작하는 도리깨 모양과 같은데, 여장(女墻, 성가퀴) 밖에서 성을 오르는 적을 치는 데 사용하였다. 『무예도보통지』에서는 지상에서 하는 보편곤을 설명하면서 자편이라는 작은 쇠막대기가 달린 편을 사용하는 갑과 단순히 긴 막대로 된 곤을 함께 사용하는 을의 겨루기를 통하여 편곤을 설명하고 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이괄의 마병 700명이 모두 편곤을 썼는데, 이를 당해내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아352)『인조실록』 권5, 인조 2년 3월 계해. 근접전에서는 편곤이 매우 위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훈련도감에서 편곤군 344명을 신설하였다.353)『인조실록』 권17, 인조 5년 9월 경인.

마상편곤은 인조 이후 조선 기병의 일반적인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세만으로 본다면 보병의 편곤과 크게 다를 것은 없지만 크게 휘둘러 베듯, 치는 위주로 되어 있다.

격구는 말을 타고 장시(杖匙)라는 채를 이용하여 공을 상대편 문에 넣는 경기이다. 격구는 고려시대에 매우 융성하였으나 다분히 유희로 흘렀다가 조선 초기에 무예 훈련의 기초가 된다고 하여 무과의 시험 과목으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무과에서 처음으로 시행된 것은 1428년(세종 8)이며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무과전시의』 규정에 의해 제도화되었다.

격구 방법은 처음에 말을 내몰 때 장을 비스듬히 말목에 두어 말귀와 더불어 가까이 두는 비이(比耳), 말의 가슴에 대는 할흉(割胸), 몸을 기울여 우러러보고 누워 장으로써 말꼬리에 비기는 방미(防尾), 달려서 공이 흩어진 곳에 이르러 장 안쪽으로 비스듬히 공을 당겨 높이 일어나게 하는 배지(排至), 장의 바깥으로 공을 밀어 당겨 던지는 지피(持彼), 비이한 후에 손을 들었다가 놓아 쳐 손을 높이 들고 아래로 드리우는 수양수(垂揚手)와 허수양수(虛垂揚手) 등이 있다.

확대보기
격구보
격구보
팝업창 닫기

격구는 예로부터 문관이나 민간들 사이에서 무예의 하나로 행해졌다. 이것을 민간에서는 ‘공치기’ 또는 ‘장치기’라고도 하며, 타구(打毬), 격방(擊棒)이라고도 한다. 이 장치기에는 오늘날 하키와 비슷한 놀이도 있었고, 작은 구멍에 달걀 크기의 공을 넣는 골프와 유사한 놀이도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354)심승구, 「조선시대 격방의 체육사적 고찰」, 『교양 교육 연구소 논문집』 3, 한국 체육 대학교, 1998. 격구의 종류는 마상 격구와 지상 격구(보행 격구) 두 가지가 있다. 즉 말을 타고 행하는 마병의 훈련용 마상 격구와 지상에서 도보로 행하는 귀족층의 지상 격구로 나뉜다. 마상 격구는 병사들이 모화관 또는 기타 넓은 빈 터에서 마상 궁술과 함께 행하였다.

마상재(馬上才)는 말 위에서 사람이 각종 곡예를 부리는 것으로 말놀음, 곡마(曲馬)라고도 한다. 선조 이후 각 군영의 기병들이 달리는 말 위에서 부리던 재주로 마상재를 할 줄 아는 사람만 해도 4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通信使)의 일행에는 으레 두 사람 이상의 마상재인(馬上才人)이 따라가서 성대한 설비를 갖추고 여러 가지 말놀음 재주를 실연하는 것을 상례로 하여 그것을 보고 일본인들이 감탄하였다 한다.355)홍우재(洪禹載), 『동사록(東槎錄)』, 임술년(1682, 숙종 8) 6월 28일.

1619년(광해군 11)에 처음으로 마상재인을 선발하였고, 한때 훈련도감 관장 아래 봄가을로 고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순조 이후로는 흐지부지되다가 아예 없어지고 말았다. 『무예도보통지』에 나오는 마상재의 종류로는 달리는 말 위에서 총(銃) 쏘기, 옆에 매달리기, 위에 매달리기, 거꾸로 서서 달리기, 자빠져서 달리기, 가로누워서 달리기, 옆에 거꾸로 매달리기, 쌍마(雙馬)를 타고 서서 총 쏘기 등 여덟 가지가 있는데,356)『무예도보통지』 권4, 마상재. 이 마상재를 할 때는 가죽신을 신지 않고 버선발로 한다 하였다.357)『무예도보통지』 권4, 관복도설(官服圖說).

확대보기
마상재
마상재
팝업창 닫기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마상 무예의 내용은 다소 소략하다. 실제 격구와 마상재의 세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를 두고 『무예도보통지』의 편찬자들이 말에 대한 실상을 알지 못하면서 이론상으로만 책을 편찬하였다고 지적하는 바도 없지 않으나,358)임동권·정형호, 『한국의 마상 무예』, 한국 마사회 마사 박물관, 1977, 60쪽. 실제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한 이들은 이론뿐만 아니라 실기에 있어서도 많은 이해와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이덕무는 성대중(成大中, 1732∼1812)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아우는 어제 영숙(백동수), 재선(박제가)과 함께 탕춘대에 가서 무예 도보를 익히고 관현악기를 울리며 술 을 들고서는 헤어진 뒤에 취해서 돌아왔습니다. 24일의 뱃놀이에 참석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나 책을 바치기 전에는 어찌 감히 자리를 떠날 수 있겠습니까. 참석하지 못할 듯합니다.”359)이덕무(李德懋),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아정유고(雅亭遺稿) 8.라고 하여 무예 도보를 편찬하는 것이 왕명에 의한 지엄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백동수, 박제가와 함께, 무예 도보를 익히고 그 책을 내기까지 절제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박제가는 “혹 말을 다루는 것은 무사들의 책임이라 하고 문신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 이는 그렇지 않다. 활쏘기는 문무가 있지만 말은 문무가 없다. 금일 문신의 말은 곧 다른 날 전사의 말이다. 따라서 말 다루기를 중국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360)박제가(朴齊家), 『정유집 부 북학의(貞蕤集附北學議)』, 내편(內篇) 마조(馬條), 국사 편찬 위원회, 1961.라고 하는 등으로 보아 알 만하다.

『무예도보통지』는 편찬과 보급 과정에 장용영 군사들의 도움이 컸다. 그들은 『무예도보통지』의 시험 대상인 동시에 『무예도보통지』를 표준 보급하는 일등 공신들이었다.

1793년(정조 17) 10월에 비변사에서 올린 「장용영외영군제절목(壯勇營外營軍制節目)」을 보면 장용영 외영의 보군이 유방(留防)할 때에는 날마다 『무예도보통지』의 18반 무예를 가르치게 하였다. 이때 각 초마다 진법 교사 1명과 기예 교사 1명씩을 두게 하였다.361)『장용영대절목(壯勇營大節目)』 3책, 외영(外營), 유방(留防). 본래 장용영 외영 마군(馬軍)인 친군위(親軍衛)는 화성 행궁을 호위하는 외에 대부분 마상 기예를 연습하였는데, 마상 기예는 『무예도보통지』에서 새로이 강조된 무예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