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5장 국권 수호에 나선 무기와 무예
  • 1. 무기의 재발견
  • 밀려오는 구미 열강
  • 병인양요
강신엽

병인양요(丙寅洋擾)는 조선이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한 사실을 빌미로 삼아 프랑스가 극동 함대를 조선에 파견하여 강화도와 한강 수로의 입구를 점령한 데에서 비롯된 조선과 프랑스 양국의 무력 충돌 사건이었다.

1866년(고종 3) 10월 일곱 척의 군함으로 구성된 프랑스 함대는 갑곶진에 상륙하여 강화부를 점령하였다. 당시 조선군은 구식 화승총(火繩銃)인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이미 1840년경부터 뇌홍 뇌관(雷汞雷管)을 격침으로 때려서 발화하는 뇌관 격발식(雷管激發式) 소총으로 무장한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 고전을 면할 길이 없었으며, 화포 역시 1837년 이래 유탄포(榴彈砲)로 개량한 프랑스군의 함포에 대항하기는 거의 불가능하였다.

프랑스군은 강화성을 점령한 이후 은괴·서적·주요 문서 등을 수거하고, 대포·화약·궁시·도검 등 각종 무기류와 갑옷·투구 등 군수품류를 다량으로 노획하였다.367)국방부 전사 편찬 연구소, 『병인·신미양요사』, 1989, 107쪽. 또 프랑스군은 강화해협을 정찰하다가 문수산성(文殊山城)에서 주둔하고 있던 조선군(초관 한성근 지휘)과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다. 조선군은 이 전투에서도 패퇴하여 통진부(通津府, 김포)로 귀환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는 프랑스군도 예상하지 못하였던 터라 그들 역시 전투 손실을 입고 사기가 저하되었다.

프랑스군의 침략에 대항해서 재야에 있던 산림(山林)들도 항전을 격려하였다. 김병학(金炳學)의 주청으로 1866년(고종 3) 9월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된 이항로(李恒老)는 조정에 올라와서 세 차례에 걸친 상소를 통해 당시 조선 정부의 반침략 투쟁을 적극 지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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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홍식 소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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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홍식 권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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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 교도들을 제외한 조선 민인들의 반침략 의지는 정족산성(鼎足山城) 전투에서 엿볼 수 있다. 정족산성 전투의 승리는 병인양요의 전쟁 영웅 양헌수(梁憲洙)의 탁월한 지휘력과 전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정족산성 전투의 승리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화력 면에서 절대 열세인 조선군이 연전연패를 거듭하다가 양헌수의 기발한 어융방략(禦戎方略)에 의해 근대적인 병기로 무장한 프랑스군을 격멸하였다. 둘째, 정족산성 패전을 계기로 프랑스군은 당초 계획하였던 서울 상륙 작전을 포기하고 철수하였다.368)국사 편찬 위원회, 『한국사』 37 서세동점과 문호 개방, 탐구당, 2000, 103쪽.

이러한 프랑스의 조선 원정은 조선과 청나라에 심각한 배외 감정(排外感情)을 고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청나라에서는 그리스도교 반대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조선에서는 쇄국양이 정책(鎖國攘夷政策)이 더욱 강화되었다. 흥선 대원군은 덕진돈대 앞에 “강화의 관문을 굳게 지킬 것이며 외국배는 삼가 통과할 수 없다.”는 비석을 세워 쇄국 정책의 의지를 내외에 선포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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