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5장 국권 수호에 나선 무기와 무예
  • 1. 무기의 재발견
  • 밀려오는 구미 열강
  • 신미양요
강신엽

신미양요(辛未洋擾)는 미국이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號) 사건을 구실로 삼아 아시아 함대를 조선에 파견하여 강화 해협으로 진입시킨 데에서 비롯된 조선과 미국 두 나라 사이의 무력 충돌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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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선박 출입 금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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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고종 8) 4월 미국의 함대가 조선의 해안에 정박하자 미국 선박이 올 것을 예상하고 있던 조선 조정에서는 이들을 접대하기 위해 세 명의 관원을 기함 콜로라도호(Colorado號)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일방적으로 강화 해역의 수심 측량을 시작하였고 이 과정에서 국경의 주요 관문인 손돌목을 침입하였다. 이것은 미국 측의 불법적인 조선 국경 침입이었다. 즉 미국 군함은 조선 측에 악의를 표기한 것이다. 따라서 조선군 수비대는 단호히 포격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손돌목 포격 사건으로 인한 군사적 긴장 관계가 발생한 이후 양국은 문정관을 통해서가 아니라 해변에 꽂아 둔 장대에 매단 편지를 통해서 의견을 교환하는 이른바 ‘장대 외교’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외교를 통해 두 나라 사이에 입장 차이가 크게 벌어지자 로우(Low) 공사는 로저스(Rodegers) 제 독과 협의를 거쳐 조선에 무력 보복을 단행하였다.

이들은 강화도 초지진에 상륙하여 광성진을 점령하고 군사 시설을 파괴하였다. 미군의 공격이 단순히 무력 보복에만 그친 것은 아니었다.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이들은 광성진에 미국 성조기를 게양함으로써 조선의 영토를 강점하려는 의도를 은연중에 내비쳤던 것이다. 이때 콜로라도호를 비롯한 5척의 군함으로 편성된 미군이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미군은 모두 플리머스(Plymouth) 총, 스프링필드(Springfield) 소총 또는 레밍턴(Remington) 후장식(後裝式) 소총으로 무장하였고, 포병대와 장교는 단도와 레밍턴 연발 권총을 착용하기도 하였다.369)김원모, 『근대 한미 관계사』(한미 전쟁편), 철학과 현실사, 1992, 463쪽. 이들 무기는 조선군의 개인 화기인 화승총보다 사거리와 발사 속도 면에서 훨씬 우수한 성능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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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라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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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만 아니라 그들의 함대에 장착한 각종 대포는 남북 전쟁(1861∼1865)을 통해서 개발된 병기로 당대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것이었다. 미국 함대의 대포는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포탄을 연속적으로 조선군 포진지에 퍼부어 삽시간에 파괴하였다. 반면 조선군의 대포는 그것에 비하면 매우 성능이 떨어졌으며, 또한 사격 방향을 빨리 조정하여 발사할 수 없는 결점을 지니고 있었다. 즉 조선군의 대포는 포대 주변에 축조된 포안(砲眼)에 포구를 일치시켜야만 사격이 가능하였으므로 사계(射界)가 극히 제한되었고, 포탄 또한 단순한 쇠뭉치로 된 포환(砲丸)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침략에 맞선 조선군, 특히 어재연(魚在淵)이 지휘하던 광성진의 군사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항전하였다. 조선군은 차라리 자살할지언정 적군의 포로가 되지 않으려는 장렬한 반침략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광성진 전투는 절대적인 화력의 열세로 조선군이 완패하였다.

이후 미군은 조선의 조정과 교섭을 시도해 보았으나 나름대로 통상의 불가능을 예상하고 조선 영해를 자진해서 떠났다. 이로써 1871년(고종 8) 신미양요로 불리는 조선과 미국 간의 군사적 대립은 해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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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된 초지 돈대
파괴된 초지 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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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는 병인양요와 마찬가지로 포함 외교를 구사하는 자본주의 열강이 군함을 앞세워 불법적으로 조선의 영토를 강점한 침략이었다. 그리고 미국은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양요 이전에 조선 정부와 교섭 경험, 즉 실질적인 관계를 맺었지만 양요를 계기로 조선과 비우호적인 실질 관계로 악화되었다.

그 후 조선은 미국과 1882년(고종 19) 조미 수호 조규(朝美修好條規)를 체결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전권대신은 서양 관원이 조선에 보낸 공식 문건 중에서 최초로 예의 있는 문서를 작성하였던 슈펠트(Shufeldt)였다. 슈펠트에 의해 흥선 대원군 집권기부터 시작된 조선과 미국의 실질적인 관계 진척에 비추어 본다면 이는 당연한 결과였다. 물론 1882년에 체결된 조미 수호 조규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는 힘의 우위를 앞세워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는 시대에 약소국들이 겪게 되는 불행이었다. 그러나 당시 동양 3국이 서양과 체결한 조약 중에서는 불평등성이 가장 적은 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던 것은 흥선 대원군 집권기 이래 강력한 반침략 투쟁을 줄기차게 전개해 온 조선인들이 얻은 최소한의 대가였다.370)연갑수, 『대원군 집권기 부국강병책 연구』, 서울 대학교 출판부, 2001, 146쪽.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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