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5장 국권 수호에 나선 무기와 무예
  • 2. 병서의 재발견
  • 외국 병서의 수입과 응용
  • 『연포도설집요(演礮圖說輯要)』와 『증보칙극록(增補則克錄)』
강신엽

『연포도설(演礮圖說)』의 저자인 정공진(丁拱辰, 1800∼1875)은 중국 최초로 서양 화기의 사용과 구조를 체계적으로 고찰하여 중국 화기를 연구·제조하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먼저 증기 기관과 기관차와 증기선의 모형을 제조하였고, 이에 관한 책을 저술하여 중국 근대 기계 공학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389)정공진의 생애와 업적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하였다.
① http://hps.phil.pku.edu.cn/index.php
② http://hps.phil.pku.edu.cn/viewarticle.php?sid=564
③ http://www.huizucn.com/bbs/redirect.php?fid=6&tid=4154&goto=nextoldset

정공진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어려서부터 부친 정종벽(丁宗璧)을 따라 상업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틈틈이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한 천문 관측에 흥미를 느껴 스스로 측구(測晷), 험성(驗星) 등의 천문 기구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는 1831년(도광 11)에 중국을 떠나는 외국 상선을 따라가 생계를 도모하였고, 뒤이어 필리핀, 루손 제도(諸島), 아랍 등지를 돌았다. 이 시기에 도수지학(度數之學)에 대한 지식이 있거나 제작에 정통한 사람과 교제하면서 함께 연구하고 토론하였다. 특히 선제(船制)와 포식(砲式)을 고찰하는 데 힘을 기울여 익히 듣고 익히 보아 마음을 다해 연구하였다.

1840년(도광 20)에 중국으로 돌아왔으나 나라가 아편을 들여와 밀거래를 하고, 영국군이 침입하는 것을 목도하고 매우 근심하였다. 그는 보국(報國)의 뜻을 품고, 중국의 화포 기술을 적극적으로 개진하였으며 자신의 성과를 널리 보급하는 데 힘썼다. 또한 자신의 저작 『연포도설』을 판각하기 위해 가산을 모두 쏟아 붇기도 하였다.

1850년(도광 30)에 초청에 응하여 계림(桂林)으로 가서 병기를 제조하였다. 이듬해 명을 받들어 광서(廣西)로 가, 태평군(太平軍)을 진압할 때 사용할 화포를 주조·감독하였다. 이어 복건성(福建省)에서는 단련(團練, 송대부터 중화민국 초기까지 농민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지주 계급이 만든 지방 무장 조직)을 운영하였다. 후에 또다시 외국으로 떠나 장사를 하기도 하였다.

1861년(함풍 11)에 이홍장(李鴻章)이 정공진을 청나라 조정에 천거하여 그에게 군대에서 서양의 무기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홍장은 그의 재주를 높이 사서 중용하려 하였으나 그는 관직에 오르지 않았다.

『칙극록(則克錄)』은 전투 시 화력(火力)으로 적군을 공격하는 기계를 도설한 병서(兵書)이다. 따라서 부제가 ‘화공격요(火攻擊要)’라고 되어 있다. 이 책은 독일의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Jean von ell Adam Schall, 탕약망(湯若望), 1591∼1666)이 구술한 내용을 명나라의 학자 초욱(焦勗)이 필술(筆述)하여 1643년(숭덕 8)에 처음 만들었으며, 이후 정공진이 다시 교정하여 1851년(함풍 1)에 간행하였다. 이 책이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조선에 수입되어 간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구성은 자서(自序), 본문, 증보칙극록기략(增補則克錄記畧), 연포적요(演礮摘要), 발문(跋文) 등으로 되어 있다.

‘자서’는 1643년에 초욱이 쓴 것으로, 자신이 서양의 군사 기술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게 된 이유와 과정, 아담 샬을 찾아가 배운 내용 중에서 중요한 것을 기록하여 이 책을 만든 경위 등이 기록되어 있다. 본문은 상·중·하 세 권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총포·화약의 기본적인 원리와 구체적인 사용법, 여러 가지 상황에 따른 전술 운용 방법 등 다양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칙극록’에는 화공(火攻)의 원리·전술이 매우 상세하게 잘 갖추어져 있지만 저술된 지 200여 년이 지나서 간혹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므로 이를 교정하였다고 밝히고 교정한 내용을 차례대로 기록하였다. ‘연포적요’는 ‘칙극록’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부록으로, 정공진이 1843년(도광 23)에 지은 『연포도설』 중에서 주요 내용을 초록해 놓은 것이다. 마지막에 실려 있는 ‘발문’은 정공진이 1851년(함풍 1)에 지은 것으로, 자신이 천거를 받아 화기 주조를 담당하게 된 경위, 『연포도설』의 초록을 책의 말미에 부록한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흥선 대원군은 1871년(고종 8)에 『연포도설』과 『칙극록』을 함께 운현궁에 보내 주었다. 이는 당시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군사 기술에 관한 한 다른 기관보다 앞서 운현궁에서 선진적인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흥선 대원군이 직접 무기 개발을 진두지휘하고 있었음을 뜻한다고 하겠다. 흥선 대원군은 『해국도지』·『연포도설집요』·『증보칙극록』 등 중국의 무기 관련 서적을 참고하고 응용해서 이전의 화포보다 성능이 향상되고 활용이 자유로운 불랑기·소포(小砲)·중포(中砲) 등을 제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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