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5장 국권 수호에 나선 무기와 무예
  • 3. 신식으로 갖춘 무기와 군대
  • 영선사 파견
강신엽

조선 조정에서는 강화도 조약 체결 직후 일본을 통하여 서구 문물제도와 특히 무비자강책(武備自强策)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신무기 도입이나 학습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과 체결한 조약 자체에 강하게 반발하던 척왜론자(斥倭論者)의 주장이 지배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가능성은 실천에 옮길 수 없었다.

결국 청나라를 통하여 무비자강책을 강구하는 길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청나라의 이홍장 등 양무(洋務) 관료가 조선 정부의 이 정책을 적극 지지하여 지원한 것은 일본과 러시아의 조선 침략을 억제하기 위해 추진하던 열국입약권도책(列國立約權導策)400)권석봉, 「이홍장의 대조선열국입약권도책에 대하여」, 『역사학보』 21, 역사학회, 1963.을 조선 정부가 거부하는 상황에서 그들이 추진한 정책과 병행되어야 할 정책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국 국력의 한계를 인식한 바탕 위에서 속방(屬邦) 관계를 공고히 할 수 있는 정책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군계학조사(軍械學造事)의401)권석봉, 「영선사행에 대한 일 고찰-특히 군계학조사를 중심으로-」, 『역사학보』 17·18, 역사학회, 1962 가능성을 청나라에 타진한 것은 강화도 조약을 맺은 해인 1876년(고종 13) 9월이었다. 조선에서는 사역원(司譯院) 부사직(副司直) 이용숙(李容肅)의 사행편에 이 계획을 청나라에 알렸으며, 이홍장은 조선의 의견에 찬성하고 정식으로 요청할 것을 지시함으로써 유학생 파견의 단서가 마련되었다. 1880년(고종 17)에 이홍장은 자국 내에서 의논을 거쳐 제조뿐만 아니라 무기 구입, 군대 훈련 문제까지 확대하여 구체적인 세목을 결정하였고, 이와 함께 유학생 파견의 절차·규모·규칙 등을 규정하여 조목화하였다.

무기 제조는 화약과 탄약의 제조에 중심을 두되 그에 필요한 사항을 11과목으로 나누고 각 과목당 한 명 내지 네 명을 배정하고, 유학생의 연령은 15∼16세로부터 20세 내외로 하며, 이들 38명을 천진 기기국(天津機器局)의 동(東)·서(西) 양국(兩局)에 배정시키고자 하였다.

무기 구입과 군대 훈련에 대해서는 도성 병력 3만 명을 마병(馬兵) 3,000명, 포병(礮兵) 3,000명, 보병(步兵) 2만 4000명으로 구분하여 이들의 무장에 필요한 무기와 그 가격을 모두 22만 1400냥으로 계획하였다. 이 무기의 조련을 위해 병사 수십 명을 선발하여 천진 창·포수에 배속시키는 한편 수뢰(水雷)·전기(電氣)의 학습도 병행시킬 계획을 세웠다.

청나라의 광서제(光緖帝)는 군기대신(軍機大臣)에게 유지를 내려 재가하고 실행 여부는 조선 국왕이 결정토록 하였다. 이러한 성공적인 교섭 결과가 조선에 전해져 이에 따라 유학생 파견은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렀다.

1881년에 고종은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에 명하여 유학생을 인솔하여 떠나는 사신의 칭호와 기술자 파견에 관한 내용을 마련하게 하였다. 사신의 칭호는 영선사(領選使)라 하고 기계는 기술자를 파견하여 학습하지만, 무기 구입과 군대 훈련은 중지할 것을 결정하였다. 영선사에는 순천부사 김윤식(金允植)을 임명하였다. 선발된 유학생은 모두 38명으로 16∼17세로부터 40여 세까지였으며, 출신은 무기 관련 학습을 수행할 수 있는 중인 또는 그 이하 계층으로 구성되었으나 양반 계층에서도 선발되었다.402)영선사에 대해서는 국사 편찬 위원회, 『한국사』 38 개화와 수구의 갈등, 1999 참조. 유학생의 학습 내용은 화약과 탄약의 제조법에만 한정되지 않고 전기·화약·제도·제련·기초 기계학 등은 물론 외국어까지로 범위가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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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임오군란(壬午軍亂)의 발발, 귀국자의 속출, 재정적 곤궁, 조선의 무기 제조 공장 설치 계획의 추진 등의 이유로 유학생의 조기 철수가 불가피하였다. 김윤식은 유학생의 철수와 기기 구입 문제에 관하여 이홍장 및 관계 위원과 두 차례에 걸쳐 회담을 가졌으며, 기기 구입 문제를 결정한 후 철수하였다. 1883년(고종 20) 3월에 천진에 있던 종사관(從事官) 김명균(金明均)이 천진 공장(天津工匠) 원영찬(袁榮燦) 등 네 명을 인솔하여 귀국한 후 삼청동 북창(北倉)에 처음으로 기기창(機器廠, 무기 제조 공장)을 창건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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