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5장 국권 수호에 나선 무기와 무예
  • 3. 신식으로 갖춘 무기와 군대
  • 교련병대 설치
강신엽

1876년 개항 이후 조선 정부가 당면한 정치적 목표를 집약하여 ‘부국강병(富國强兵)’으로 표현하고 있듯이, 군사력의 근대화는 당시 조선이 추구해야 할 가장 중대하고도 절실한 과제였다. 두 차례에 걸친 대일 수신사(對日修信使) 파견과 청나라와의 부단한 외교 접촉을 통하여 당시의 국제적 조류(潮流)인 제국주의적 식민 경향을 깨닫게 된 위정자들은 ‘부국강병’ 이외에는 장차 국가를 보전할 길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880년(고종 17)부터 선진 근대 문물의 도입에 노력을 기울였고,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시도된 것이 통리기무아문의 설치(1880년 12월)와 신사 유람단(紳士遊覽團)의 파견(1881년 1월), 그리고 군사력의 근대화 추진이었다.

군사력의 근대화는 무기 체계의 개선과 이로 훈련된 병력을 확보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조선 정부는 이를 위한 계획을 추진하였는데, 근대 무기의 제조법을 배우기 위하여 영선사 일행을 청나라에 파견하였으며(1881년 윤7월), 이보다 3개월 앞선 4월에는 교련병대(敎鍊兵隊, 속칭 倭別技)를 창설하여 신식 군사 훈련에 착수하였다.403)교련병대에 대해서는 최병옥, 「교련병대(속칭, 왜별기) 연구」, 『군사』 18, 전사 편찬 연구소, 198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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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파견된 어윤중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파견된 어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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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
유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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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련병대는 경오영(京五營)의 지원자 중에서 신체 건강한 자 80여 명을 선발하여 윤웅렬(尹雄烈)과 김노완(金魯莞)의 통솔하에 모화관(慕華館)을 임시 훈련장으로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갔으며, 훈련대장 신정희(申正熙)가 직접 모화관에 나와 이들의 훈련 상황을 살펴보고 금일봉을 주면서 격려까지 하였다.

통리기무아문은 「선병조련절목(選兵操練節目)」을 마련하였으며, 국왕의 지시에 따라 소속 장병과 대원의 급료 및 복장을 무위소(武衛所)에서 담당하여 지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련병대의 간부진도 구성하였는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한성근(韓成根)을 통리기무아문 참획관(參劃官) 겸 정령관(正領官)에, 윤웅렬과 김노완을 동 아문의 참사(參事) 겸 부령관(副領官)에, 우범선(禹範善)을 참령관(參領官)에 임명하였으며, 좌부령관(左副領官)에 이범진(李範晋), 우부령관(右副領官)에 정용섭(丁龍燮), 참령관에 이광렬(李光烈)·정순용(鄭舜瑢) 등을 추가로 임명하여 이들로 하여금 교련병대를 통솔하게 하였다.

교련병대는 통리기무아문 13사(司)404)통리기무아문은 사대(事大)·교린(交隣)·군무(軍務)·변정(邊政)·통상(通商)·군물(軍物)·기계(機械)·선함(船艦)·기연(譏沿)·어학(語學)·전선(典選)·이용(理用)·율례(律例) 등 13사(司)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에서 군무사(軍務司) 소속이었다. 군무사는 다시 총무국(總務局), 참모국(參謀局), 교련국(敎鍊局)으로 업무 를 분장하여 처리하였다. 총무국은 군무사 내의 모든 업무와 규제, 인사, 경리사무를 담당하였다. 참모국은 작전 계획의 수립과 지리, 각국의 병제, 전사 편찬 등을 담당하였다. 교련국은 생도와 병졸의 교육을 관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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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은문(迎恩門)
영은문(迎恩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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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련병대는 교련국 소속으로서 사관생도대(士官生徒隊)와 기예병대(技藝兵隊)로 나뉘었다. 사관생도대는 속성반과 정규반으로 나뉘어 생도를 양성하였고, 기예병대는 병졸을 양성하였다.

교련병대의 교육 장소는 임시 교육 장소였던 모화관에서 창의문(彰義門) 밖 평창(平倉)으로 옮겼다가 이듬해인 1881년(고종 18) 남소영(南小營, 남산 북동쪽 산록), 하도감(下都監, 훈련도감의 무기고)으로 이동하여 다음해 임오군란으로 해체될 때까지 사용하였다.

교련병대의 교육 훈련 내용은 군사 기본 동작인 제식 훈련과 군사 이론 및 소총의 사용법 등이었고, 사관생도의 경우 속성 과정을 수료하면 종6품 무관직에 임명되었던 듯하다.

교련병대의 설치를 전후한 시기의 국내 정세는 서양과 일본 세력에 대한 배척 운동인 이른바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따라서 악화되고 있던 배일(排日) 여론을 고려하지 않고 일본의 도움을 받아 설치한 교련병대는 척왜(斥倭) 사상과 연결되어 보수 세력은 물론 일반 국민들에게도 지지를 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위소 설치 이후 차별 대우를 받고 있던 구식 군대의 불만을 증폭시킴으로써 임오군란을 확대시키는 한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청나라는 조선의 교련병대 설치를 포함한 일련의 대일 접근책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의 조선 진출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청나라는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즉시 군대를 파견하여 조선의 군사 문제를 포함한 정치·경제·외교 면에 대한 간섭을 적극적으로 강화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의 조선 진출 계획은 일시적이나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교련병대는 설치된 지 1년 2개월 만에 임오군란으로 해체된 소규모 신식 군사 교육 기관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우리나라 군사 근대화를 위하여 외국 군사 교관을 초빙하여 실시한 최초의 신식 군사 훈련으로서의 의미가 있었으며, 또한 그것의 창설과 운영이 임오군란의 한 원인이 되고 청나라의 군사 개입을 초래하는 등 정치·외교사적 측면에서의 의의도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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