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5장 국권 수호에 나선 무기와 무예
  • 4. 체육 활동
  • 교육으로서의 체육
강신엽

조선시대에는 유교가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여졌을 뿐만 아니라 유교적 사회 질서가 정착되었다. 따라서 사회의 숭문(崇文) 분위기는 더욱 강해지고, 유교 위주의 교육도 좀 더 강화되었다. 때문에 신체에 대한 관심과 활동을 등한시하여 체육이 교육으로 인식되지도 못하였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도 유교가 추구하는 이상적 인간상을 구현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유교의 기본적 교양인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의 육예(六藝)가 중시되었다. 신체적인 면에서도 유교가 추구하는 이상적 인간상을 갖추어야 했기 때문에 악·사·어가 교육될 수 있었다. 특히 활쏘기가 유교적 교육의 일환으로 장려되었는데, 활쏘기를 위주로 한 성균관(成均館)의 대사례(大射禮)와 향교(鄕校) 등의 향사례(鄕射禮)는 주요한 행사로 자리 잡고 있었다.

대사례는 국가의 두 가지 대사(大事) 중 하나인 제사에 참석할 사람을 선발하기 위해서 시행한 의례였으며, 나아가 위정자로서의 자격을 부여하 는 제도였다. 따라서 대사례는 군주의 주관하에 군신 상하가 한자리에 모여 활쏘기 행사를 통하여 예와 악을 익히는 과정에서 상호 간의 지배 질서를 확인하고 화합 분위기를 조성하는 한 방편이었다. 향사례는 지방관의 주관하에 사례(射禮)를 행하여 지방민에게 예와 악을 익히게 함과 동시에 상하 관계를 결속시키는 제도로 정착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406)대사례와 향사례와 관련한 연구 논문은 다음과 같다.
강신엽, 「국궁에 반영된 철학 사상」, 『제2회 참모총장배 궁도 대회 기념 학술 세미나』, 육군 박물관, 2000. 9.
강신엽, 「국궁에 반영된 철학 사상」, 『학예지』 7(제2회 참모총장배 궁도 대회 기념 학술 세미나 논문 수정·보완), 육군 박물관, 2000. 9.
강신엽, 「조선시대 대사례의 시행과 그 운영-『대사례의궤』를 중심으로-」, 『조선시대사 학보』 16, 조선시대사 학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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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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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체육 교육은 사례에서만 아니라 무예 연마의 차원에서도 적극 실시되었다. 과거제에 무과를 신설하는 등 상무적 성격의 체육 교육을 장려한 것이 대표적이다. 특히 전문적인 무예 교육기관인 무학(武學)을 설치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무예 교육을 장려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무학의 설립은 독립된 교육 기관에서 신체 활동 위주의 교육이 행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무학에서 실시한 기사(騎射)와 보사(步射)가 신체의 고른 균형 감각과 발달된 상체 근육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무학을 오늘날의 체육 학 교로 볼 수도 있다. 사립 교육 기관인 서당에서는 과외 체육의 형식을 띤 놀이로서 가마놀이가 행해지기도 하였다. 한편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학문 정진을 위한 수단으로 신체 건강에 관심을 두고 양생법(養生法)을 행하기도 하였는데, 이중 도인법(導引法)은 일종의 보건 체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활인심서(活人心書)』 등의 양생 관련 서적이 유학자들에게 널리 통용되었고, 후학들에게 전수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점에서 양생법의 보급은 체육 교육의 일환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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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인심방(活人心方)』
『활인심방(活人心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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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이 전통 사회에서는 체육이 하나의 독립된 교육 과정으로는 실시되지 않았다. 하지만 신체 운동을 위주로 하는 교육을 체육으로 이해할 경우 체육은 전통 사회에서도 교육의 한 부분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전통 사회의 체육 교육에는 오늘날의 체육적 개념과 인식이 반영된 것은 아니었지만 다양한 신체 활동 과정을 통해 신체 기능의 발달이라는 오늘날과 같은 체육 교육의 목표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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