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5장 국권 수호에 나선 무기와 무예
  • 5. 자강과 독립의 길
  • 의병 전쟁의 전개와 신무기의 갈망
강신엽

을미의병으로 알려진 제1차 의병 전쟁(1896)은 1894년 청일 전쟁, 갑오개혁, 이듬해의 명성 황후 시해, 단발령 등 일련의 사건이 벌어진 직후에 일어났다. 특히 단발령은 전쟁의 불씨가 되어 전국의 재야 유생들을 격동시켰다. 이것은 개항 이후 농민 경제의 파탄과 누적된 반일 감정이 폭발한 것이었다. 제1차 의병 전쟁은 9개월 동안이나 계속되었지만 개화 관군을 격퇴할 만큼 강력한 무기와 조직을 갖지 못하였으며, 해산 조치 하나에 감격하고 항쟁을 포기한 시골 선비들은 진정으로 군사적 승리를 쟁취하기보다 군사적 시위로 만족한 인상을 강하게 풍겼다.

제2차 의병 전쟁은 제1차 의병 전쟁 이후 10년 만에 일어났으나 그 사이에 서학당(西學黨)·영학당(英學黨)·활빈당(活貧黨) 등이 항쟁을 계속하였다. 광무 연간(1897∼1906)에 벌어진 이들 운동의 이름은 달랐으나 구성과 구호는 의병 전쟁과 거의 다름이 없었다.

1905년 9월 러일 전쟁의 휴전 성립을 전후하여 중부와 삼남(三南, 충청·전라·경상도) 각지에 의병이 일어났다. 재연된 의병 전쟁은 1906년 여름까지 계속 확대되었다. 병오의병이라고도 하는 제2차 의병 전쟁의 주도층은 역시 지방 유생들이었고 포수와 농민이 이에 가담하였다. 이 시기에 일어난 유생의병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컸던 사건은 홍주의 민종식(閔宗植) 의병(1906년 3월)과 남원의 최익현(崔益鉉) 의병(1906년 6월)이었다. 이 두 사람은 전직 관료 유생으로서 특히 주목을 끌었으며, 최익현의 무저항적 저항은 민중의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제2차 의병 전쟁은 1907년 8월 한국군의 항전을 계기로 마침내 전국 의병이 반일 독립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전쟁은 농민 봉기로 시작되었으며 의병은 동·면 단위로 조직되어 연합하고 분열되면서 일제가 장악하고 있던 지방 관청을 파괴하고 시읍을 점령하였으며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1907 년 말까지 전쟁은 확대일로에 있었고 일본군은 전촌전소(全村全燒)의 초토 작전을 감행하였다.

1908년 초 이인영(李麟榮)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 창의군(十三道倡義軍)이 조직되어 서울 탈환 작전을 시도하였고, 각국 영사관에 교전 단체를 통고하였다. 1908년 가을에 들어서자 의병 전쟁은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고, 그 후 1년 동안 유격전이 수시로 전개되었다. 간도·노령에서도 의병군이 조직되어 국내 진공 작전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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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도 창의군 서울 진격전
13도 창의군 서울 진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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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저항한 전라도와 황해도 의병 가운데 평민 의병장들의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그 일부는 한일 병합 후에도 계속 국내 항전을 계속하였고 다른 일부 의병들은 간도로 망명하여 독립군 운동을 주도하였다. 유인석(柳鱗錫)과 홍범도(洪範圖)는 대조적이면서도 가장 이름난 의병장이었다.

제2차 의병 전쟁에 있어서도 유생과 농민의 갈등이 있었으나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두 신분의 편견은 차츰 희박해졌고 민족의식은 계속 성장하였다. 그들은 일본 침략자를 증오하고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경제 침탈에 함께 항거하면서 일체감을 느꼈던 것이다. 유생과 농민의 결합은 일제 강점기 동안에도 지속되었고 한국 농민의 보수주의적 경향을 한층 강화시켰던 것이다.410)의병 전쟁에 대하여는 국사 편찬 위원회, 『한국사』 43 국권 회복 운동, 탐구당, 1999 참조.

이러한 의병이 보유한 무기는 보잘것없었다. 제1차 의병 전쟁 당시에 도 동학 농민 운동 때와 마찬가지로 무기는 매우 열악하였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동학군은 죽창(竹槍), 화승총(火繩銃), 천보총(千步銃) 등과 같은 전근대적 무기로 무장한 반면에 일본군은 스나이더 소총(Snider rifle)과 무라다 소총(村田小銃) 같은 세계적 수준의 무기로 무장하였으므로, 동학군과 일본군 화력의 차이는 1 : 250 심지어 1 : 500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411)박맹수, 「동학 농민 운동기 일본군의 무기-스나이더 소총과 무라타 소총을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사 연구』 17, 한국 근현대사 학회, 2001 여름, 2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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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승총
화승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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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보총
천보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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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의병 전쟁에 이르러서도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당시 의병 부대는 칼, 창, 화승총 등 재래식 무기를 주로 소지하고 있었다. 이것으로는 군대를 아무리 잘 운용한다 하더라도 38식 소총, 기관총 등을 사용하는 일본군을 상대로 전쟁하여 승리하기란 요원한 것이었다. 일본군은 러일 전쟁 중인 1905년에 제작된 최신 38식 소총을 사용하였으며 필요하면 기관총까지 동원하였다. 따라서 의병 전쟁은 화승총과 38식 소총의 싸움이었고 승패는 이미 여기서 갈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412)일본군의 38식 소총은 유효 사거리 360m, 분당 8∼10발을 사격할 수 있었으나, 화승총은 유효 사거리 70m 내외, 몇 분에 1발을 사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07년 함경도 북청의 후치령(厚峙嶺) 전투에서처럼 드물게나마 30년식 무라다총·모제르총(Mauser銃)·피스톨(pistol) 등 신식 무기를 사용하여 일본군을 고전하게 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의병은 대부분 매우 열악한 무기를 휴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병은 이러한 상황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화승총을 개조하든 양총(洋銃)을 구입하든 간에 신식총으로 무장하여 승리하는 것이 의병들의 소망이며 집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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