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5장 국권 수호에 나선 무기와 무예
  • 6. 독립 운동, 무기는 나의 생명
  • 독립 운동의 전개
강신엽

일제에게 국권을 강탈당한 후 민족 지도자들은 민족 자결주의와 2·8 독립 선언에 고무되어 1919년 3월 1일에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고, 국내외에 독립을 선포하였다. 이에 서울과 지방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거족적인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만주와 연해주, 미국, 일본 등 국외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3·1 운동은 전 민족이 참여한 대규모의 독립 운동이었으며,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을 한 차원 승화시키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3·1 운동은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과 자신감을 갖게 하고 국내외에 민족의 주체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3·1 운동을 계기로 독립을 선포한 우리 민족은 좀 더 조직적으로 독립 운동을 추진하고, 독립 전후의 국민 국가 건설을 준비하기 위하여 정부를 수립하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연해주의 대한 국민의회, 국내의 한성 정 부, 중국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세 정부가 하나로 통합되어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출범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이하 ‘임정’으로 약칭)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근대적 헌법을 갖추고 대통령제를 채택하였다. 초기의 임정은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의 민족 독립 운동을 좀 더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추진하는 중추 기관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임정은 외교 활동에도 많은 힘을 쏟았으며, 『독립신문』을 간행하여 배포함으로써 안으로는 민족의 독립 의식을 고취시키고 밖으로는 한국의 자주성과 민족 문화의 우월성을 인식시켰다.

3·1 운동을 전후하여 노령·간도·중국·미주에 살고 있던 교포들도 일제히 독립 운동을 벌였다. 특히 간도와 노령에는 수백만의 교포가 거주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독립군 단체가 조직되어 독립 전쟁의 개시를 알려 주었다.

간도 독립군은 한말 의병 전쟁의 주역인 유생·농민·한국군이 주도하는 가운데 군사적인 승리만이 민족 해방의 유일한 길이라 믿었으며, 강력한 왕정(王政)의 회복이 분열과 혼란을 막는 첩경(捷徑)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일제는 간도 독립군을 가장 위협적인 항일 노선으로 간주하고 1920년 간도 대토벌을 감행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경신참변(庚申慘變)이었다. 경신참변으로 교포 3만 명이 학살되고 6,000호가 불타는 피해를 입었다. 이 같은 참화 속에서도 독립군은 1925년의 미쓰야 협정(三矢協定)이 체결될 때까지 치열한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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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영수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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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에 이르러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대륙 침략이 시작되자 임정은 항일 노선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즉 안으로 사회주의 독립 운동에 대항하기 위한 사회주의적 정강을 채택하고 일당 체제(一黨體制)를 지향하였으며, 밖으로 독립 전쟁 노선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1940년 광복군을 창군하였으며 건국 강령을 선포하였다.413)광복군에 대하여는 이현희, 「중경 임정과 한국 광복군 연구-그 성립과 편제-」, 『군사』 22, 전사 편찬 연구소, 199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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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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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 직전 광복군은 독자적으로 군사 행동이 가능해졌다. 광복 직전에 3대 독립 군사 단체가 있었으니 그 하나가 광복군(김구)이었다. 나머지는 연안의 조선 혁명군(김무정)과 간도 장백산의 조선 인민 혁명군(김일성)이었다. 세 단체는 각각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그리고 소련 당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해방 조국의 운명을 좌우할 실질적 정치 세력이었다.

이와 같이 끈질긴 독립 전쟁과 연합군의 승리로 우리 민족은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1945년 8월 15일에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동안 국내외에서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노력하던 우리 민족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고 건국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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