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5장 국권 수호에 나선 무기와 무예
  • 7. 체육으로 지킨 민족의 자존심
  • 전통 체육의 시련과 부흥
강신엽

일제는 민족 문화 말살 정책을 전개하여 조선의 전통을 억압하였다. 이것은 체육 활동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제는 조선인들이 무예를 익혀 그들에게 저항할 뿐만 아니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에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무예의 수련과 계승을 사전에 차단한 것이었다. 따라서 상무적인 무예나 놀이는 공식적으로 금지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민간에서는 알게 모르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태껸은 바로 그러한 대표적인 예이다.

손 기술 위주인 수벽치기는 주로 군사 무예로 발달하다가 근대식 군제와 무기 체제의 도입, 군대 해산을 계기로 단절된 반면에 태껸417)태껸과 관련해서는 도기현의 자전적 에세이 『택견 그리고 나의 스승 송덕기』, 동재, 2003도 참고할 만하다.은 주로 놀이 중심으로 발달하였기 때문에 일본의 무술에서 스포츠로 발전한 유도, 검도 등의 확산 속에서도 면면히 명맥을 유지하였다. 더욱이 황국 식민화 정책을 통해 민족 문화를 말살하려던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끈끈한 생명 력을 유지해 온 전통 무예로서의 태껸은 그런 의미에서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418)심승구, 「한국 무예의 역사와 특성-도수 무예를 중심으로-」, 『군사』 43, 군사 편찬 연구소, 2001, 291쪽.

한편 씨름과 활쏘기는 무예로서의 특성을 상실하고 민속적인 경기로 발전하였다. 일제 강점기 때에도 씨름은 ‘국기(國技)’라고 할 정도로 전국 각지에서 대중적인 인기와 사랑을 받은 민족적인 놀이였다. 이러한 씨름이 민속놀이 성격에서 벗어나 현대적 경기로 발전할 목적으로 개최된 씨름 대회는 조선 씨름 협회가 주최한 전 조선 씨름 대회였다. 조선 씨름 협회는 1927년 창립되었으며, 같은 해 9월 창립 기념 제1회 전 조선 씨름 대회를 서울 휘문 고등 보통학교에서 개최하였다. 1936년 새로 거듭난 씨름 협회는 조선일보사 강당에서 제1회 전 조선 씨름 선수권 대회를 개최하여 100여 명의 선수가 참가하였으며, 6회 대회까지 열렸다. 그러나 이것은 태평양 전쟁으로 말미암아 광복 후까지 중단되었다. 광복 후 1946년에 대한 씨름 협회로 개명한 다음 1947년 제7회 전국 대회를 개최한 이래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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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쏘기
활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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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쏘기는 군사적인 특성이 사라지고 놀이 내지 스포츠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한일 병합과 더불어 조선의 일본화를 우려한 나머지 궁도인(弓道人)들은 1928년에 조선 궁술 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이듬해에는 『조선의 궁술』을 발간하여 활쏘기의 올바른 모습을 기록으로 남겼다. 1928년에는 전 조선 궁술 대회를 개최하였다. 호남 지역에서는 5개 지역(강경, 황등, 이리, 군산, 김제)의 사정(射亭)이 모여서 궁술 경기회를 상설 기관으로 조직하고 제1회 궁술 경기를 개최하기도 하였다.419)『동아일보』 1933년 9월 14일자. 1932년에는 조선 궁도회로 개명하였다가 광복 후 1946년에 조선 궁도 협회로 바뀌었다. 1948년에 대한 궁도 협회로 변경하여 지금까지 궁도의 저변 인구를 확대해 가면서 발전하고 있다.

이렇듯 전통 체육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무예나 교육적인 의미보다는 놀이 내지 경기로 변화하고 발전하여 왔다. 현재 전통 무예를 표방하는 무예도 있으며, 단절된 과거의 무예를 복원하는 노력이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원류에 부합하느냐하는 문제는 좀 더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기록이 미비하거나 도해(圖解)가 현전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임을 고려할 때 전통 문화 복원이라는 미명 아래 오히려 일을 그르칠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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