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4권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 제5장 국권 수호에 나선 무기와 무예
  • 7. 체육으로 지킨 민족의 자존심
  • 근대 체육의 도입과 전개
강신엽

문호 개방 이후 개화 지식인들은 사회 진화론의 입장에서 서구의 근대 체육을 적극 수용하였다. 즉, 근대 교육을 실시하여야 우승열패(優勝劣敗)의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인식은 학교 교육에서 체육 교육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서구의 근대 스포츠가 학교를 중심으로 도입·보급되었다. 특히 여러 학교가 모여 실시한 연합 운동회를 통해 일반에까지 근대 운동 경기들이 소개되었다.420)근대 체육에 관해서는 이학래, 『한국 체육사 연구』, 국학 자료원, 2003 참조.

그러나 일제의 침탈이 본격화되고 결국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민족의 위기의식은 더욱 강해졌다. 그 결과 체육도 민족주의적 성격이 좀 더 강화되어 갔다. 연합 운동회는 점차 학생 중심의 단순한 운동 경기적 성격에서 벗어나 민족적 일체감을 형성하고 애국 계몽 사상을 고취하는 전 국민적인 행사로 발전하였다.

일제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통감부를 설치함으로써 실질적으로 대한제국의 행정권을 장악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체육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계속 억압하려 하였다. 일제는 학교에서 실시한 병식 체조(兵式體操) 와 군사 훈련을 적극 지지하였으며, 운동회는 개최 횟수를 제한하거나 아예 금지하고자 하였다. 이 같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연합 운동회는 계속 열렸으며, 심지어 일제 경찰과 충돌하기까지 하는 등 체육을 통한 민족 운동은 더욱 확대되었다.

확대보기
운동회
운동회
팝업창 닫기

또한 이 시기에는 대한 체육 구락부(大韓體育俱樂部), 황성 기독교 청년회 운동부(皇城基督敎靑年會運動部) 등 많은 체육 단체가 결성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들 단체의 설립 목적은 대부분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체육을 널리 보급하는 데 있었다. 이러한 체육 단체의 활동은 국권 회복을 위한 민족주의 이념의 한 표현이기도 하였으며, 따라서 민족의 에너지를 창출·동원하여 결집시킨 중요한 기틀이었다. 나아가 이후 항일 민족 운동에도 지대한 공헌을 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1910년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면서 민족주의적 체육은 본격적으로 탄압을 받게 되고, 일제는 식민주의 체육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체육 단체는 황성 기독교 청년회였다. 기독교 단체라는 특성에 따라 일제의 간섭이 비교적 약하였기 때문에 기독교 청년회에서의 체육 활동은 체육을 통한 민족 운동에서 큰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근대 운동 경기의 보급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일제의 문화 정치기에는 식민지 지배 정책에 직접적으로 맞서지 않는 범위 안에서 단체의 설립이 어느 정도 허용되었기 때문에, 조선 체육회를 비롯한 전국적 체육 단체와 각종 경기 단체가 결성되었다. 관서 체육회(關西體育會)도 민족 운동가인 조만식(曺晩植)을 회장으로 하여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에 저항하면서 성장하였다. 이들 두 단체는 일제하 체육 발전의 주역으로 평가해도 지나침이 없다. 이 밖에도 기독교 청년회를 비롯한 청년 단체들이 체육 단체를 결성하였고, 각 지방에서도 90여 개의 체육 단체가 결성되어 체육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민족주의적 체육 단체는 전통 경기의 보급 외에도 체육의 대중화에도 힘썼다. 이러한 활동은 당시 체육이 우리 민족 내부의 소수 특권 계층에 한정되어 보급된 것을 반성하고 체육의 대중적 보급이야 말로 민족 체력을 증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인식한 것에서 출발하였다. 이러한 인식에서 대중 체육으로 보급된 것이 보건 체조였다

보건 체조는 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소콜 운동(Socol Movement)과 덴마크의 닐스 북(Niels Bukh) 체조였다. 특히 소콜 운동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족 독립 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는데, 이를 우리나라에 수용하여 대중에게 보급하려고 한 것은 이들 체조의 보급을 통해 우리의 민족 운동 역량을 강화하는 데 목적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체육의 대중적 보급은 대중 운동의 역량을 강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근대 체육의 수용 계층을 확대하여 체육을 사회적으로 보편화시켰다.

체육이 활성화되자 각종 경기 종목에서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하는 선수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특히 올림픽 경기 등과 같은 국제 대회에서 우리 선수들이 펼친 활약은 민족적 긍지를 확인한 것이었으며, 일제의 민족 동화 정책에 대결할 수 있는 저력을 심어 준 것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孫基禎)과 남승룡(南昇龍)이 거둔 승리였다. 이것은 우리 선수들이 세계의 젊은이들과 겨루어 이룩한 첫 세계 제패로서 우리 체육사에 큰 획을 긋는 쾌거였다.

확대보기
손기정 투구
손기정 투구
팝업창 닫기

이 쾌거는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의거로 이어져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는 민족 운동으로 승화되었다. 『동아일보』의 이길용(李吉用) 기자는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이룩한 두 선수의 쾌거를 우리 민족의 승리로 인식하여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말소하는 의거를 감행하였다. 이 사건은 개화기 이래 꾸준히 전개·발전된 민족 체육의 성과가 생명력을 잃지 않고 꾸준히 잠재되어 있다가 마라톤 세계 제패라는 쾌거를 계기로 식민지 체제 동안 억눌렸던 민족의식과 결합하여 일어난 민족 운동이었다. 특히 일제가 황민화 정책을 식민지 통치의 근간으로 내세웠던 시기에 그들의 국체 상징인 일장기를 제거하였다는 데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과는 우리 민족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역할을 하였고, 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함으로써 식민지 체제 아래에서 패배적인 사상에 젖지 않게 하여 민족의식을 보존하는 최후의 보루로 기능하기도 하였다.

한국 스포츠의 총본산인 대한 체육회는 1920년 7월 13일에 창립되어 활동하다가 1938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광복 후 부활한 대한 체육회는 매년 전국 소년 체육 대회와 전국 체육 대회를 개최하여 우수 선수 발굴과 스포츠 인구 저변 확대에 앞장서고 있다. 대한 체육회는 오랜 역사 속에 가꾸어 온 대회 운영 능력을 바탕으로 86 아시안 게임과 88 서울 올림픽을 국내에 유치하여 성공적으로 치르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아울러 엘리트 체육의 요람인 태릉 선수촌 시설을 현대화하는 등 국가 대표 선수 훈련 시설을 확충하고 보수해서 훈련 여건 개선에 주력하고 있다. 나아가 대한 체육회는 53개 가맹 경기 단체, 16개의 시도 지부와 14개 해외 지부을 운영하면서 한국 스포츠의 세계화에 힘쓰고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