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5권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
  • 제1장 천문의 관측과 기상의 측후
  • 1. ‘관상’, 천문 현상의 관측
  • ‘관상’의 목적
구만옥

‘관상’의 대상과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은 전근대 사회에서 관상을 담당하던 천문 역산학(天文曆算學)의 학문 대상과 목적을 묻는 것이기 도 하다. 전통 사회에서 천문 역산학은 ‘제왕(帝王)의 학문’으로 간주되었다. 유교에서는 제왕의 첫 번째 임무를 ‘관상 수시(觀象授時, 하늘의 형상을 관찰하여 시간을 부여함)’로 규정하여 천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새로운 왕조가 수립되었을 때에는 천명(天命)의 수수(收受)와 왕조 개창의 정당성을 이념적으로 표방할 수 있는 천문학의 정비를 우선적인 과제로 삼았다. 따라서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삼은 역대 왕조의 과학 정책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건국의 정당성을 정치적·사상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천문학의 정비와 천문 역법의 발달이었다. 조선 왕조 개국 초에 이루어진 태조대의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각석(刻石), 세종대의 간의대(簡儀臺) 설립과 『칠정산(七政算)』 편찬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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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토라 고분의 천문도
기토라 고분의 천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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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3월에 일본 나라현(奈良縣) 아스카촌(明日香村)의 기토라 고분 안 천장에서 600개가 넘는 별이 새겨진 천문도가 발견되었다. 기토라 고분의 축조 연대는 대략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로, 우리나라의 통일신라시대에 해당한다. 일본 도카이(東海)대학 정보 기술 센터는 천문도에 그려진 성좌(星座)와 별의 운행 궤도, 태양의 운행을 나타내는 황도(黃道), 적도(赤道) 등의 천체 자료를 컴퓨터로 분석하였다. 그 결과 별자리는 일본에서 본 하늘이 아니고, 관측 지점은 북위 38∼39도 지역이었으며, 관측 시기는 기원 전후(넓게 보면 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라고 추정하였다.

당시 이 기사에 접한 우리나라 학자들은 그 별자리의 모습이 우리의 전통적인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와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현존하는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조선 태조 때 만든 것이지만, 원본은 고구려 천문도였다고 전해진다. 고구려가 멸망할 때 대동강 물에 빠뜨린 고구려 천문도의 인쇄본을 바탕으로 약간의 수정을 거쳐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제작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기토라 고분의 천문도는 황해도나 평안남도 지역에서 관측한 자료를 근거로 작성한 고구려 천문도를 전수받아 만들었거나 고구려에서 온 사람들(渡來人)이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삼국시대 천체 관측의 구체적인 증거를 우리는 기토라 고분의 별 그림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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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 덮개돌의 별 그림
고인돌 덮개돌의 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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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삼국시대 이전에도 이 땅에서는 천체 관측이 이루어졌을까? 북한의 학자들은 고조선 때 만든 고인돌 돌판의 별 그림(성혈(性穴), 알구멍, cup mark)을 통해 그 사실을 입증하고자 하였다. 평안남도 증산군 용덕리 고인돌, 평안남도 평원군 원화리 고인돌, 함경남도 함주군 지석리 고인돌 등이 대표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고인돌 덮개돌에는 인위적으로 파낸 작은 홈들이 있는데, 이 홈들이 북두칠성 같은 대표적 별자리를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아울러 별자리의 세차(歲差) 운동을 근거로 고인돌의 축조 연대, 나아가 고조선시대의 연대 비정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4)조선 기술 발전사 편찬 위원회 편, 『조선 기술 발전사(원시·고대편)』,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6, 174∼180쪽 참조. 이들의 주장을 모두 신뢰하기 어렵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으나, 고인돌 덮개돌의 작은 홈들이 별을 표시한 것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으며, 이는 원시 사회 이래로 인간이 꾸준히 천체 관측을 하였다는 방증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선조들을 포함한 인류는 왜 오랜 옛날부터 천체 현상에 관심을 두었던 것일까? 천문학은 이른바 ‘하늘의 과학’이다. 오늘날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포함한 태양계, 나아가 별과 은하 등 우주 전체의 구조와 운동, 변화를 탐구하는 것이 천문학의 주된 목적이다. 그렇다면 옛날 사람들도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천체를 관찰하였을까? 물론 옛날 사람 가운데도 우주의 탄생 과정이라든가 태양계의 구조적인 모습과 같은 문제에 관심을 갖는 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원시 사회 이래 인간이 천체를 관찰하던 본디 목적은 아니었을 것이다.

옛날 사람들이 천체를 관측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서였다. 농경 생활을 시작한 이후 원활한 생산 활동을 위해 1년 사계절의 변화를 미리 파악해 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관상 수시’의 관념이 여기에 해당한다. 오늘날 시간을 알기 위해 하늘을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근대적 시간 관념은 근대 사회의 대표적 상징물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는 시계에 표상되어 있고, 우리는 시계를 통해 시간을 바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계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어떨까?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문명의 이기들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 시간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바로 하늘을 보는 것이었다.

옛날 사람들이 시간을 알기 위해서만 하늘을 보았던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우리 선조들이 남겨 놓은 역사책을 보면 많은 천문 관측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하늘을 보는 일이 시간을 알기 위한 목적에 한정되었다면 태양과 달의 운동, 또는 대표적인 몇 개의 별과 별자리를 관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역사책을 살펴보면 옛날 사람들은 태양과 달의 운동 이외에 여러 가지 천문 현상에도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달이 태양을 가리는 일식, 지구의 그림자가 달을 가리는 월식, 행성들이 하늘을 움직이다가 서로를 가리는 현상, 혜성이나 새로운 별의 출현 등이 그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왜 이러한 것을 관측하고, 역사책에 기록해 두 었을까? 그것은 바로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고대 국가는 선진적인 문화를 갖춘 부족이 주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고대 국가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각각의 부족은 그들 나름의 신앙 대상을 갖고 있었다. 단군 신화에 나타나는 곰이나 호랑이는 바로 곰과 호랑이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던 부족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여러 부족을 통합해서 국가를 만든 중심 부족은 다른 여러 부족보다 우월한 어떤 것을 신앙의 대상으로 제시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사회를 아우를 필요가 있었다. 이런 필요에 따라 호출된 것이 바로 ‘하늘’이었다. 해와 달과 별이 움직이고, 비와 눈이 내리고, 때에 따라서는 일식과 월식이 일어나고, 천둥과 번개가 치는 하늘은 고대인들에게 그야말로 신비롭고 권위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동시에 하늘은 현실적으로 햇빛을 통해 지상의 만물을 발육시키는 생명의 원천이기도 하였다. 농경 사회로 진입하여 농업의 중요성이 증대됨에 따라 태양과 그것을 포괄하는 하늘의 권위는 더욱 높아졌을 것이다. 때문에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고대 사회의 왕은 이런 하늘의 권위를 빌어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굳건히 하고자 하였다. 단군의 아버지 환웅(桓雄)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거나,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의 아버지가 천제(天帝) 또는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解慕漱)였다는 이야기는 모두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듯 고대 국가의 왕은 하늘의 아들로서, 하늘의 명령을 받아 인간 사회를 다스린다고 관념되었다. 때문에 왕은 하늘의 명령을 잘 받들어야 하였고, 그러기 위해 하늘에서 벌어지는 일을 자세히 살펴야만 하였다. 여기에서 하늘의 변화를 통해 인간·사회·국가의 운명을 점치는 점성술(占星術)이 발달하게 되었다. 일식이나 월식, 태양 흑점의 변화, 혜성의 출현 등 하늘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현상을 일일이 관측하고 역사책에 기록해 놓은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고구려의 ‘일자(日者)’나 백제의 ‘일 관부(日官部)’는 모두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던 관원 또는 관청의 이름이었다. 국가 체제가 정비되어 감에 따라 천문학을 담당하는 국가 기관도 질서를 갖추게 되었다. 고려 왕조는 사천대(뒤에 ‘서운관’으로 명칭 변경)라는 천문 관측 기관을 두어 국가적인 차원에서 천체 관측을 하였고, 조선 왕조는 고려의 전통을 이어받아 서운관(뒤에 ‘관상감’으로 명칭 변경)이라는 관청을 설치하였다.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 따르면 서운관에서는 “천문·역수·측후·각루에 관한 일을 맡아본다.”고 하였고,5)『고려사(高麗史)』 권76, 지(志)30, 백관(百官)1. 『조선왕조실록』에는 “서운관은 천문의 재상(災祥)과 역일(曆日)을 추택(推擇)하는 등의 일을 관장”한다고 되어 있다.6)『태조실록』 권1, 태조 원년 7월 정미. 이 가운데 ‘역수·각루·역일’은 시간과 역법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며, ‘천문·측후·재상’은 하늘에서 벌어지는 각종 천체 현상과 비정상적인 현상으로 규정된 재이(災異)를 관측하는 일이다. 요컨대 전통적으로 천문을 담당하는 기관에서는 시간을 파악하고 역법을 작성하는 일과 함께 점성술과 관련된 각종 천체 현상을 관측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이와 같은 현상이 국가나 지배자의 운명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전통적인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과 재이설(災異說)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유교 정치론인 천명사상(天命思想)이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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