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5권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
  • 제1장 천문의 관측과 기상의 측후
  • 2. 천문대와 천문 의기
  • 천문대, 첨성대에서 간의대까지
구만옥

천문 관측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시설은 천문대이다. 경주의 첨성대(瞻星臺)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알려져 있다. 신라 선덕여왕 때 만들어져 지금까지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남아 있으니 우리에게는 참으로 소중한 과학 문화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첨성대의 세부적 기능과 역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이견이 분분하다. 사람들은 대부분 ‘첨성대(별을 관찰하는 곳)’라는 말 그대로 천문대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천문대가 아닌 일종의 종교적 상징물이라고 본다.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塹星壇)이 별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었던 것처럼 첨성대도 종교적인 행사를 치르기 위한 제단이었다는 주장이다. 해 그림자를 측정하여 계절의 변화를 파악하는 ‘규표(圭表)’였다는 주장, 독립 왕국으로서 신라의 국력을 과시하고자 하는 수학적 상징물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최근에는 선덕여왕대의 정치적 상황과 33천(天) 신앙을 연결시키고, 첨성대가 우물 모양이라는 사실에 착안하여 첨성대가 이 세상과 우주를 연결하는 ‘우주목(宇宙木)’과 같은 기능을 하였다는 흥미로운 견해가 제시되기도 하였다.12)이상의 논의에 대해서는 김용운·김용국, 『한국 수학사』, 과학과 인간사, 1977, 88∼96쪽 ; 이용범, 『한국 과학 사상사 연구』, 동국대학교 출판부, 1993, 1∼69쪽 ; 남천우, 『유물의 재발견』, 학고재, 1997, 125∼158쪽 ; 전상운, 『한국 과학사』, 사이언스북스, 2000, 69∼82쪽 ; 김기흥,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 비평사, 2000, 250∼262쪽을 참조.

첨성대를 둘러싼 다양한 논란은 첨성대의 독특한 구조에 기인한다. 첨성대가 천문대였다면 그 위에서 실제로 천체 관측이 이루어졌을 텐데, 경주에 가서 첨성대를 직접 본 사람은 금방 알 수 있듯이 첨성대는 꼭대기에 올라가기가 쉽지 않은 구조이다. 첨성대를 천문대로 믿는 사람들은 첨성대의 남쪽에 뚫린 네모진 창문까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첨성대의 내부로 들어간 다음, 다시 첨성대의 내부에 설치된 사다리를 타고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고 주장한다.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상당히 불편하게 설계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더욱이 첨성대의 내부는 외부와 다르게 돌들이 다듬어져 있지 않다. 사람들이 오르내리기에 불편하다는 말이다. 때문에 이런 문제점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다른 의견을 내놓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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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
첨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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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의 또 다른 이유는 기록의 문제 때문이다. 첨성대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정사인 『삼국사기』에는 없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남아 있는데, 거기에는 단지 첨성대의 축조 사실만 기록되어 있을 뿐 기능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13)『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기이(紀異) 1,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 사람들이 첨성대를 오르내리며 천문을 관측하였다는 것은 고려시대 이후의 기록에서 확인된다.14)『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고적(古跡), 첨성대(瞻星臺). 때문에 천문대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후세 사람들이 덧붙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첨성대의 본래의 목적과는 차이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렇다면 첨성대는 과연 천문대였을까? 분명히 천문대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천문대의 기능에 한정되지는 않았다. 당시 ‘천문’을 관찰한다는 것이 곧 오늘날의 과학적인 천문학을 뜻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늘에 드리워진 무늬(天文)’, 즉 하늘의 의지를 간접적으로 드러내 주는 천체의 이상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앞서 살펴본 각종 천문 기록들이 이러한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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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첨성대
개성 첨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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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의 역사적 전통은 이후 면면히 이어졌다. 개성의 만월대 서쪽에는 고려 첨성대의 유물로 알려진 석조물이 있다. 그것은 넓이가 약 3㎡인 돌판을 높이 3m 가량 되는 돌기둥 다섯 개가 떠받치고 있는 형태이다. 돌판의 네 귀퉁이에는 돌난간을 세웠던 자리로 보이는 직경 12㎝ 가량, 깊이 9㎝ 가량의 구멍이 파여 있다. 따라서 고려 첨성대의 원형은 돌난간을 둘러 세운 관천대이거나, 아니면 여러 층으로 구성된 석조 구조물이었다고 추정된다. 북한에서는 1994년 이 유물에 대한 종합적인 발굴 사업을 진행하였는데, 이때의 조사를 통해 이 구조물의 축대 방위가 진북(眞北) 방향에서 동쪽으로 약 15° 틀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이것이 천문대의 축조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라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천 문대는 원래 정확히 진북을 향하도록 설계되었을 터인데, 현재 건물 방향이 동쪽으로 틀어져 있다는 것은 세차 운동의 영향 때문이고, 따라서 1년 동안의 세차치(50.2″)를 고려하여 역산하면 천문대의 축조 연대를 알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계산 방법에 의해 이 구조물이 10세기 초에 세워졌다고 추정하였다.15)조선 기술 발전사 편찬 위원회 편, 『조선 기술 발전사 3(고려편)』,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4, 235∼237쪽 참조.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천문대로는 세종 때 건립된 간의대를 들 수 있다. 조선 초기 서운관은 경복궁과 북부 광화방(廣化坊)의 두 곳에 있었다.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설치된 간의대는 높이 31척, 길이 47척, 넓이 32척의 석조 건축물이었다. 김돈(金墩, 1385∼1440)의 기록에 따르면, 간의대를 세운 계기는 1432년(세종 14) 경연(經筵)에서 세종이 천문 의기의 미비를 지적하면서 정인지(鄭麟趾)와 정초(鄭招)에게 간의(簡儀)를 제작하게 한 것이었다. 이에 정인지와 정초는 옛 제도를 검토하고, 이천(李蕆)이 실무적인 공역을 담당하여 간의를 완성하였다. 바로 이 간의를 설치하기 위한 시설물로 축조한 것이 경회루 북쪽의 간의대였다.16)『세종실록』 권77, 세종 19년 4월 갑술. 간의대의 축조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17)『세종실록』 권61, 세종 15년 7월 임신. “予命製簡儀於慶會樓北垣墻之內, 築臺設簡儀, 欲構屋于司僕門內, 使書雲觀入直看候如何.”라는 기록이 간의대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 아닌가 한다. 정초·이천·정인지·김빈(金鑌) 등이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여 진상한 1433년(세종 15) 8월에는 이미 간의대가 존재하고 있었다. 당시 세자가 간의대에서 정초 등과 간의 및 혼천의의 제도를 토론하고, 김빈과 최습(崔濕) 등에게 간의대에서 숙직하면서 천체의 운동을 관측하여 간의와 혼천의가 제대로 제작되었는지를 검토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18)『세종실록』 권61, 세종 15년 8월 신묘.

간의대에는 혼천의·혼상(渾象)·정방안(正方案) 등이 부설되었고, 그 서쪽에는 높이 40척에 달하는 거대한 규표를 세워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관측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이는 원(元)나라의 곽수경(郭守敬)이 세운 거대한 천문대 이후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갖춘 것이었다. 간의대가 완성된 이후 세종은 서운관에서 모든 관측 업무를 주관하게 하였다. 1438년(세종 20)부터는 매일 밤 다섯 명씩의 서운관 관리가 입직하여 지속적인 관측 을 수행하였다.19)『세종실록』 권80, 세종 20년 3월 무자. 이후 경복궁의 간의대는 여러 번의 개수 과정을 거치면서 조선 왕조의 중앙 천문대로서 기능하였으나, 불행히도 임진왜란 때 완전히 파괴된 이후 다시는 그 위용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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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방 관천대
광화방 관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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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간의대와 함께 규모가 작은 또 하나의 간의대가 한양 북부 광화방에 세워졌다. 현재 종로구 계동 현대 사옥 앞에 서 있는, ‘광화방 관천대’라고 불리는 구조물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경복궁에 있는 대간의대(大簡儀臺)의 축소판으로 소간의대(小簡儀臺)라고도 불렸는데, 관측을 할 때 그 위에 소간의를 설치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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