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5권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
  • 제1장 천문의 관측과 기상의 측후
  • 2. 천문대와 천문 의기
  • 천문 의기, 의상과 구루
구만옥

첨성대 이래로 각종 천문대에는 천체 관측 기구와 해시계·물시계 등이 가설되어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천체 관측에서 가장 기초적인 사항은 시간에 따른 천체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운관지』에 기재되어 있는 각종 천문 현상에 대한 보고 양식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예컨대 혜성의 경우 “밤 몇 경에 객성이 어느 별자리의 도수(度數) 내에 나타났는데, 혜성과 유사하다.”20)『서운관지』 권1, 번규.라는 형식으로 보고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관측 당시의 시각을 정확하게 알아야 했고, 아울러 혜성이 출 현한 위치도 파악해야만 하였다. 이처럼 시간과 위치의 파악은 천체 관측에서 필수적인 사항이었다.

시간을 측정하기 위한 도구인 해시계와 물시계, 천체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기구인 혼천의·간의 등의 각종 천문 의기는 천문대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 요소였을 것이다. 따라서 천문대의 축조는 단순히 건축물을 세우는 데 그치지 않았고, 그와 병행해서 의상(儀象, 천문 의기)과 구루(晷漏, 해시계와 물시계)의 제작이 이루어져야 했다. 다음에서는 관상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천문 의기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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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기옥형도(璿璣玉衡圖)
선기옥형도(璿璣玉衡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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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천문 의기 가운데 가장 중시되었던 것은 혼천의였다. 그것은 혼천설(渾天說)이라는 중국의 고대 우주론에 입각하여 만든 천체 관측 기구였다. 혼천의는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는데, 크게 육합의(六合儀)·삼신의(三辰儀)·사유의(四遊儀)라는 구형으로 된 의기가 삼중으로 연결되어 있다. 육합의는 지평환(地平環)·천경환(天經環)·천위환(天緯環)이라는 세 개의 고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로써 상하사방(六合)을 측정할 수 있기 때문에 ‘육합의’라고 하였다. 육합의의 내부에 연결된 삼신의는 천경환·적도환(赤道環)·황도환(黃道環)·백도환(白道環) 등의 고리로 구성되어 일월성신(日月星辰)을 관측하는 것이었다. 해와 달과 별(三辰)을 관측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삼신의’라고 불렀다. 삼신의 내부에 연결되어 있는 사유의는 천경환과 직거(直距)·옥형(玉衡)으로 구성된다. 중앙에 설치된 옥형을 동서남북으로 움직이며 천체를 관측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유의’라고 하였다.

혼천의의 제작은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세종대에 혼천의의 제도가 마련된 이후 조선 왕조 전 기간을 걸쳐 이에 대한 보수와 개량 사업이 이어졌다. 혼천의 제작 기사는 세종대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1433년(세종 15) 정초·박연(朴堧)·김진(金鎭) 등이 혼천의를 만들어 바쳤다.21)『세종실록』 권60, 세종 15년 6월 경인. 이것은 곧이어 간의의 제작과 간의대의 축조로 연결되었고,22)『세종실록』 권61, 세종 15년 7월 임신. 이후 간의대에서 혼천의와 간의의 제도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23)『세종실록』 권61, 세종 15년 8월 신묘. 이 기록들을 살펴보면 당시 제작된 혼천의에는 정초·박연·김진 등이 1433년 6월에 제작한 것과 정초·이천·정인지·김빈 등이 8월에 제작한 것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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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때의 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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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혼천의는 가장 중시된 천문 의기였지만, 복잡한 구조 때문에 실제 관측에 활용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었다. 혼천의에는 지평 좌표계와 적도 좌표계, 그리고 황도 좌표계가 하나의 중심을 축으로 중첩되어 있다. 이 때문에 육합의·삼신의·사유의의 여러 고리들이 층층이 겹쳐 있어서 실제로 관측에 사용하기에는 불편하였다.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간의였다. 간의의 창시자는 원대의 걸출한 천문학자인 곽수경으로 알려져 있다. 세종대의 간의는 바로 곽수경의 그것을 모델로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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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때의 소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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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의는 혼천의의 지평 좌표계와 적도 좌표계를 분리시켜 관측에 편리하도록 만든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크게 적도의식(赤道儀式) 장치와 지평의식(地平儀式) 장치로 이루어져 있다. 적도의식 장치는 후극환(候極環)·사유쌍환(四遊雙環)·규형(窺衡)·계형(界衡)·적도환·백각환(百刻環)으로 구성되어 있고, 지평의식 장치는 입운환(立運環)·지평환·규형으로 구성되어 있다.24)이용삼, 「세종대 간의의 구조와 사용법」, 『동방학지』 93,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96 참조. 적도의식 장치로는 천체의 위치(북극에서 천체까지의 각거리인 거극도(去極度)와 28수의 거성(距星)에서 천체까지의 각거리인 입수도(入宿度))와 밤낮의 시각을 측정하였고, 지평의식 장치로는 천체의 지평 고도와 방위를 측정하였다.

세종대의 천문 의기 제작 사업은 1432년(세종 14) 경연에서 세종이 발의한 이후 7년간의 사업을 거쳐 1438년(세종 20)에 완성되었다.25)『세종실록』 권77, 세종 19년 4월 갑술 ; 『증보문헌비고』 권2, 상위고2, 의상(儀象)1. 『세종실록』과 『증보문헌비고』의 기사는 거의 일치하는데, 다만 『증보문헌비고』에는 공역(工役)을 감독한 사람으로 이천(李蕆)과 함께 장영실(蔣英實)이 거론되어 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이 기간에 제작된 천문 의기로는 혼천의와 간의 이외에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혼상·규표, 앙부일구(仰釜日晷)·천평일구(天平日晷)·현주일구(懸珠日晷) 등의 해시계, 간의를 축소한 소간의도 있었다. 소간의를 만든 때는 1434년(세종 16)이었고, 이천·정초·정인지 등이 주도하였다.26)『세종실록』 권77, 세종 19년 4월 갑술. 소간의는 간의의 적도의식 장치를 분리해서 더욱 간단하게 만든 기구이다. 소간의의 구성 요소는 사유환과 규형, 사유환의 중심축 아래 겹쳐 놓은 적도환과 백각환, 그 리고 이를 지탱하는 받침대가 전부이다. 사유환을 극축에 맞추어 기울이면 적도의식 관측기구가 되고, 수직으로 세워 놓으면 지평의식 기구가 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천문 관측 의기 가운데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이 이른바 ‘주야측후기(晝夜測候器)’인 일성정시의이다. 1437년(세종 19)에 모두 네 벌을 제작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궁내에 두었고, 다른 하나는 서운관에 비치하여 관측에 이용토록 하였으며, 나머지 두 개는 변경인 함길도(咸吉道)와 평안도(平安道)의 군영에 보내어 군중의 경비에 이용하게 하였다.27)『세종실록』 권77, 세종 19년 4월 갑술·6월 병자. 당시에는 이미 혼의·혼상·규표·대간의·소간의 등의 ‘의상’과 자격루(自擊漏), 앙부일구·천평일구·현주일구 등의 ‘구루’가 빠짐없이 제작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성정시의를 제작하게 된 까닭은 기존의 해시계로는 밤의 시간 측정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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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정시의 복원품
일성정시의 복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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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정시의는 『주례(周禮)』나 『원사(元史)』 등의 경전과 사서에 소개되어 있는 별을 이용한 시간 측정 방법을 참조하여 독창적으로 제작한 시계였다. 낮에는 태양의 운동을 통해, 밤에는 별의 움직임을 이용해서 태양시(太陽時)와 항성시(恒星時)를 측정하는 장치였던 것이다. 그것은 극축을 조정하는 정극환, 별과 태양을 관측하는 계형, 적도와 평행한 원반에 주천도분환(周天度分環)·일구백각환(日晷百刻環)·성구백각환(星晷百刻環)의 세 고리를 차례로 연결한 구조로 되어 있다. 제일 바깥쪽에서 회전하는 주천도분환은 주천 도수(周天度數)를 새기고 각각의 도(度)를 4등분하였다. 그 안에 고정된 일구(日晷)에는 12시 100각을 새겼는데 매각을 6등분하였으며, 제일 안쪽에 있는 성구백각환에는 일구백각환과 같은 눈금을 새겼다.

일성정시의의 관측 방법은 계형과 정극환의 중심을 연결한 두 실을 관측하고자 하는 천체와 일직선으로 맞추는 방식이었다. 낮에는 태양을 관측한 다음 일구백각환의 눈금을 읽어 시간을 측정하였고, 밤에는 제성(帝星)을 관측한 다음 성구백각환의 눈금을 읽어 시간을 측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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