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5권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
  • 제1장 천문의 관측과 기상의 측후
  • 3. 천상열차분야지도와 전통 별자리
  • 천상열차분야지도
구만옥

평양성에 있었다고 전하는 고구려 석각 천문도의 전통은 이후 고려와 조선 왕조를 거치면서 면면히 계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전쟁의 와중에 대동강 물속으로 사라져 버린 고구려 석각 천문도의 인쇄본이 세상에 전하고 있었고, 그것이 고려를 거쳐 계승되다가 조선 초에 화려하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자 당시 민간에 전해 오던 고구려 천문도의 인쇄본을 바친 사람이 있었고, 이성계는 이것을 토대로 새로운 천문도를 돌에 새기도록 서운관에 지시하였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국립 고궁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국보 ‘천상열차분야지도’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고구려 천문도의 단순한 복사본이 아니다. 당시 태조의 명을 받은 서운관에서 고구려 천문도의 인쇄본을 검토한 결과, 만든 지가 오래되어 별자리의 위치에 오차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에 서운관에서는 새로운 관측 결과에 입각하여 오차를 교정한 후 새로운 천문도를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태조의 허락에 따라 서운관에서 『중성기(中星記)』라는 책을 편찬하여 중성(中星)의 위치를 바로잡고, 그에 근거하여 새로운 석각 천문도를 완성한 것은 1395년(태조 4) 12 월이었다.

‘천상열차분야지도’란 하늘의 모습(天象)을 차(次)와 분야(分野)에 따라 벌여 놓은 그림이라는 뜻이다. ‘차’란 목성의 운행을 기준으로 적도 부근을 서에서 동으로 나눈 12구역을 가리키며, ‘분야’란 하늘의 별자리를 12구역으로 나누고 그것을 땅의 해당 지역과 대응시킨 것으로, 다분히 점성술적인 내용이었다. 가로 약 1m, 세로 약 2m의 돌 위에 새긴 이 원형 천문도에는 1,460여 개의 별이 표시되어 있다. 둥그런 원의 중심에는 북극이 있고, 그 북극을 중심으로 관측지의 위도에 따른 작은 원(週極圓)과 적도권(赤道圈)·황도권(黃道圈)이 그려져 있다. 원의 주위에는 28수의 명칭과 적도수도(赤道宿度)가 기록되어 있으며, 각 별자리의 중심별(距星)과 북극을 연결한 선을 통해 각각의 별의 입수도(入宿度)를 눈으로 쉽게 판별할 수 있도록 그려 놓았다.

오늘날의 성도는 천구상의 각종 천체(항성·성단·성운 등)의 겉보기 위치를 투영법으로 나타내고, 천체의 등급을 비롯한 그 밖의 특성도 표시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성도는 천체를 관측할 때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이다. 전통적인 천문도 역시 이와 같은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천문 관측을 담당하던 관상감에서는 천문도를 “천상을 관측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인식하였고, 천문도의 인쇄·보급에 힘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성도와 전통적인 천문도는 그 제작 목적에서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하단 부분에 새겨져 있는 권근(權近)의 설명문에 따르면, 이 천문도를 만든 가장 중요한 목적은 고대 제왕의 ‘하늘을 받드는 정치(奉天之政)’를 본받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위로 ‘천시(天時)’를 받들고, 아래로 ‘민사(民事)’를 삼가는 것이었다. “하늘의 형상을 관찰하여 백성들에게 시간을 준다(觀象授時).”,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들의 일을 부지런히 한다(敬天勤民).”라는 명제가 의미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었 다. 역대 왕조에서 천문학을 중시한 이유와 고대의 성인들이 하늘의 형상을 관찰하고 각종 의기를 제작한 이유는 오직 하늘을 공경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전통 사회에서 천문도의 작성은 오늘날의 성도처럼 과학적·객관적 목적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고, 그 안에는 뿌리 깊은 유교 정치 사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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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열차분야지도(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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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열차분야지도(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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