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5권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
  • 제2장 시간의 측정과 보시
  • 3. 시간 측정의 시작
문중양

인간은 어떻게 시간을 인식하고 측정하기 시작하였을까? 아마도 생활 속에서 규칙적으로 발생하는 자연의 변화를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시간을 인식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그 중에서 인간의 일상적인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자연물인 태양이 만들어 내는 하루의 시간 주기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시간 단위가 되었다. 태양은 자전 주기로 하루의 시간을 만들고, 공전 주기로 1년의 시간을 만든다. 또한, 하루 중에서 뜨고 지는 태양은 낮(밝음)의 시간과 밤(어둠)의 시간을 구분해 주었고, 1년 중의 태양의 고도 변화는 춥고 따스한 시간, 즉 봄·여름·가을·겨울의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태양의 주기적 변화 다음으로 인간의 눈에 포착된 자연의 변화는 태양이 지고 난 후의 하늘에서 가장 밝은 자연물인 달이었을 것이다. 달은 대략 29.5일을 주기로 뜨고 지는 시각과 함께 모양이 바뀌었다. 즉, 해 질 무렵에 뜨던 보름달이 이후 점점 찌그러져 반달이 되면서 매일 늦게 뜨다가 약 29.5일 만에 다시 보름달이 되면서 해 질 무렵에 뜬다. 이처럼 규칙적인 달의 주기가 음력에서 말하는 한 달이다.70)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양력의 29·30·31일의 한 달 길이는 달의 운행 주기로 계산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단지 편의상 1년을 불균등하게 나누었을 뿐이다. 불균등하게 나누게 된 계기도 과학적인 이유가 아니라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즉,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즉위한 달인 8월을 31일로 늘리면서 작은달(30일)과 큰달(31일)을 교대로 규칙적으로 배치하던 방식이 깨져 현재와 같이 되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서술은 움베르토 에코 등, 김석희 옮김, 『시간 박물관』, 푸른 숲, 2000, 46∼47쪽을 참조할 것. 그런데 불편하게도 하루의 시간 주기, 한 달의 시간 주기, 그리고 1년의 시간 주기가 모두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하루가 29개 모이면 한 달이 못 되고, 30개 모이면 한 달에서 넘친다. 또한, 한 달의 주기가 12개 합쳐도 1년에서 많이 모자란다. 13개 합치면 1년에서 훨씬 넘친다. 따라서 하루의 주기, 달의 주기, 그리고 1년의 주기를 적절히 배합하는 문제는 천문학자들을 오래 전부터 괴롭혔던 문제였다. 전통적으로 4년마다 윤달을 끼워 넣는 방식 등은 힘들게 얻은 해결책 중의 하나였다.71)이러한 문제는 역법(曆法)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제3장 ‘역과 역서’를 참조할 것.

태양과 달 이외에도 별의 운행을 보고 시간을 알 수도 있다. 그러나 별의 운행을 보고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훨씬 복잡한 선행 지식이 필요하다. 별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야 하는데, 별의 위치는 계절에 따라 매일 매일 달라진다. 따라서 별을 보고 시간을 측정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비해 태양을 보고 정확한 하루의 시간을 측정하는 일은 비교적 쉬웠다. 실제로 인간이 관측 기구를 이용해 시간을 측정하기 시작한 것은 태양의 그림자를 측정해서 시간을 간단하게 계산하기 시작하면서였다.

아마도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관측 기구는 단순하게 평평한 땅위에 수직으로 박아 세운 막대기 또는 기둥이었던 듯하다. 인류가 시간을 재고 처음으로 역법을 만든 때부터 이 단순한 막대기는 중요한 천문 데이터를 가져다주었다. 그 중에서 해 그림자의 길이에 따라 하루 중의 시각을 알려 주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기능이다. 이 때문에 이 막대기를 우리는 해시계(sundial)라 부른다.

그 밖에도 이 수직 막대기를 통해 동서남북의 방위를 결정할 수 있다. 방법은 단순하다. 막대기의 둘레에 동심원을 그리고, 그림자 끝의 궤적을 그리면 동심원을 관통하는 호(弧)가 그려지는데, 동심원과 호가 만나는 점을 이으면 동서 방향이 된다. 이 동서 방향의 선에 수직선을 그으면 그것이 남북 방향이다. 그런데 이러한 방위의 결정은 다른 천문 데이터의 측정에 앞서 가장 먼저 확보해야 할 사안이었다. 남북 방향이 정해져야 시각을 측정할 수 있는 눈금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통은 정식 해시계를 만들어 사용하기에 앞서 별도의 방위 결정을 위한 기구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예컨대 『원사(元史)』에 나오는 ‘정방안(正方案)’이 이것이다. 구조는 간단하다. 수직으로 세운 막대기 주위에 여러 개의 동심원을 그렸다. 규모도 크지 않아 쉽게 설치할 수 있다. 일반적인 해시계뿐 아니라 천문 관측 기구를 설치할 때에도 그에 앞서 이 정방안을 갖다 놓고 방위를 먼저 결정하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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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방안 복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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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방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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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때 종합적인 관측 기구를 창제하고 설치할 때에도 이 정방안을 만든 바 있다. 유물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형태는 단언할 수 없지만, 관련 사료를 통해 충분히 추정이 가능하다. 즉, 한 변이 4척인 정사각형에 두께가 1촌인 넓은 판자를 깔고, 둘레에는 홈을 파서 수거(水渠)를 만들어 물을 채워 수평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한가운데에 1척 5촌의 막대기를 세우는데, 동지 때에는 1척, 하지 때에는 3척의 길이를 썼다고 한다. 그 둘레에는 원을 1촌 간격으로 긋는데, 모두 19개의 원을 그었다.72)『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 권3, 정방안.

정방안과 같은 기구를 이용해서 동서남북의 방위가 결정되면 이어 여러 천문 데이터를 측정하였다. 하루 중의 시각은 물론이고, 하지와 동지 같은 중요한 시점도 측정하였다. 해 그림자는 동지 때 가장 길고, 하지 때 가장 짧기 때문이다. 특히, 동지는 1년의 시작 기점으로 삼는 때였기 때문에 동지 시점을 정확히 파악함은 1년의 시간 주기를 정확히 파악하는 의미가 되었다. 동지와 하지 시점을 구할 수 있음은 나아가 절기를 측정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동지와 하지 때의 해 그림자 길이의 중간 지점들이 절기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1년 중의 해 그림자 궤적을 따라 눈금을 적절하게 그려 놓으면, 매일 매일의 해 그림자가 가리키는 눈금만 읽어도 절기를 알 수 있다. 한편, 수직으로 세운 이 막대기를 이용하면, 일반인에게는 중요하지 않지만 천문학자에게는 매우 중요한 데이터인 관측지의 위도(緯度)라든가 황도 경사각(黃道傾斜角)을 측정할 수 있다.73)동지 때의 태양 고도를 α, 하지 때의 태양 고도를 β라면, 관측지의 위도 φ =90-(α+β)/2이다. 또한, 황도 경사각(즉 태양의 궤도인 황도가 천구의 적도와 이루는 경사각) ε=(β-α)/2가 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이은성, 「해시계의 역사와 그 원리」, 『역사학보』 33, 역사학회, 1982, 85∼86쪽을 참조할 것.

동양과 서양 모두 이 간단한 구조의, 지평에 수직으로 세운 막대기를 오래 전부터 사용하였다. 서양에서는 이를 ‘노몬(gnomon)’이라 불렀고,74)서양의 노몬 유적으로는 영국 솔즈베리(Salisbury) 근교에 있는 유명한 스톤헨지(Stonehenge)를 들 수 있다. 물론 스톤헨지가 노몬인지 아닌지는 논의가 분분하다. 동아시아에서는 표(表), 얼(臬), 비(髀)라 불렀다. 『서경』, 『좌전(左傳)』, 『회남자(淮南子)』 등의 고대 문헌에는 표를 써서 동짓날과 하짓날에 그림자를 쟀다는 기록이 많이 나온다. 특히, 1년 중 해 그림자가 가장 짧은 하짓날의 그림자를 측정하였다. 보통 표의 길이는 8척(尺)이었고, 태양이 남중(南中)할 때의 그림자를 재기 위해 지평에 눈금을 새긴 판을 만들었는데, 그것을 규(圭)라 하였다. 이와 같이 수직으로 세운 막대기인 표와 땅 위에 그려 놓은 눈금인 규를 합쳐 ‘규표(圭表)’라 불렀다.

표는 동짓날 정확한 태양년을 구할 때뿐 아니라 세상의 중심을 구하는 데에도 사용되었음이 흥미롭다. 『주례(周禮)』 「대사도(大司徒)」에 의하면, 8척 높이의 표를 세워서 하짓날 태양이 남중할 때 해 그림자의 길이가 정확히 1척 5촌이 되는 곳이 땅과 세상의 중심이었다. 그곳을 일러 ‘지중(地中)’이라 불렀다. 지중은 모든 세상의 중심으로서, 단지 지리적 중심의 개념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곳이다. 즉, 지리적으로 중심일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이 만나는 형이상학적 중심, 음양이 가장 조화로워 사계절이 고르게 순환하고 그럼으로써 만물이 풍성하게 번성하는 최적의 이상향이었다. 이 지역은 바로 주공(周公)이 도읍으로 정하였던 낙양(洛陽)에서 남동쪽으로 80㎞ 떨어진 고성(告城, 과거의 양성)인데, 8척 높이의 표가 하짓날 해가 남중할 때 만들어 내는 그림자 길이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1척 5촌이 되는 곳이라고 믿어 왔다. 이와 같이 본질적으로 특별한 지역인 지중은 동아시아 문명에서 가장 이상적인 유교적 문명국이었던 주(周)나라의 서울이었다. 물론 현대인의 관념으로는 납득이 안 되는 대목이다. 지리적 중심이라고 해서 음양이 조화를 이루는 가장 이상적인 지역일 이유가 없다. 또한, 하짓날 태양이 남중할 때 8척 길이의 표 그림자가 1척 5촌이 되는 곳이 한 곳뿐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 고성과 위도가 같은 지역은 모두 그림자 길이가 1척 5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 고성에는 ‘주공 측경대(周公測景臺)’라고 부르는 거대한 규표가 있다. 40척(약 12m) 높이의 표는 없어졌지만 표를 세웠던 거대한 석대가 있고, 그 북쪽에는 그림자 길이를 재는 120척(36.5m) 길이의 규가 있다. 물론 주나라 때의 것은 아니며, 1276년경 원나라의 천문학자 곽수경이 세웠고, 이후 다시 명나라 때 보수한 것이다. 원나라 이전에 주공 측경대가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 있더라도 전통적인 8척 높이였을 것이다. 곽수경이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전통적인 8척 높이의 다섯 배인 40척으로 늘렸기 때문이다. 이후 지중으로 믿었던 고성에는 대대로 이 거대한 상징적인 규표가 우뚝 서 있었다.

조선 세종 때에도 곽수경의 규표를 모델로 규표를 만들었다. 현재 유물이 남아 있지 않아 세종 때의 동표(銅表)가 어떤 모양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관련 역사 기록을 통해 중국 과학사 학자인 니덤(Joseph Needham)이 그 형태를 추정해서 복원도를 제시한 바 있다. 최근에는 경기도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릉의 기념관에 실제 크기의 10분의 1 크기로 축소해서 복원해 놓았다. 그것에 의하면 해 그림자를 받는 규는 청석(靑石)으로, 표는 동(銅)으로 제작하였다. 규는 길이 128척에 너비 4척 5촌 크기이고, 둘레에 홈을 파서 물을 담아 수평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표는 곽수경의 예에 따라 40척 높이였는데, 두 마리의 용이 가로로 누운 횡량(橫粱)을 지탱하고 있는 형상이다. 이 횡량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를 측정하게 되는데, 횡량의 높이가 규 높이에서부터 40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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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때의 동표
세종 때의 동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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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와 표 외에도 ‘영부(景符)’라는 부속품이 달려 있었다. 이것은 해 그림자를 더욱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한 장치로, 전통적인 8척 높이의 규표에는 없었다. 40척 높이의 규표는 8척에 비해 측정 오차를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표가 높을수록 해 그림자가 흐릿해져 측정이 힘들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흐릿해진 해 그림자를 분명하게 잡아 내는 장치가 영부이다. 그 원리는 ‘바늘구멍 사진기’의 원리였다. 해 그림자를 만드는 횡량은 길이 6척, 지름 3척의 원통형 막대기이고, 그 가운데에는 지름 2분(分) 크기의 구멍이 나 있다. 이 구멍 가운데를 가는 선이 가로지르고 있는 구조이다. 영부는 너비 2촌(寸), 길이 2촌 크기의 가는 판때기로 그림자를 받는데, 그 가운데에는 바늘이나 좁쌀 크기만한 구멍이 뚫려 있다. 그러면 횡량의 구멍을 통과한 햇빛이 다시 영부 판때기의 바늘구멍을 통과해서 규면 위에 비추고, 햇빛을 양분시킨 가는 철사의 상이 규면 위에 맺히게 된다. 실험에 의하면, 영부를 1.5∼2㎜만 틀린 위치에 놓아도 가는 철사가 햇빛을 양분하지 않고 치우칠 정도로 정확하게 해 그림자를 잴 수 있다고 한다.75)中國天文學史整理硏究小組 編, 『中國天文學史』, 北京 : 科學出版社, 1981, 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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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표 복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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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부 복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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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규표를 세종은 1437년(세종 19) 4월 경복궁의 북서쪽에 위치한 종합적인 천문 관측소였던 간의대(簡儀臺) 서쪽 옆에 세우도록 하였다. ‘관상 수시’의 상징적 기구인 이 규표는 동아시아에서는 아무 데서나 만들어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천하를 지배하는 중국 황제의 허락을 받아야만 세울 수 있었다. 세울 수 있는 곳도 특별한 지역인 북경(北京), 상도(上都, 원나라 때의 여름철 서울), 광동성의 남해(南海), 그리고 양성(陽城)에만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먼 변방 제후국 조선의 서울 궁궐 안에 거대한 규표를 간의대와 함께 세웠으니, 그 의미가 매우 각별하다. 이는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고 있는 중국에 맞서 정치적으로 독립국임을 내부적으로 규정하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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